과학와 불교

이전/Life ? 2013. 6. 16. 18:18

우주라는 거대한 自然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러한 우주의 한 일부분이며 전체이고 전부이다.

일부분이지만 하나의 유기체적인 존재에서 연기법으로 흐르는 우리는 서로가 無關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여 관계하여 살아가고 있다. 미시적인 존재나 거시적인 존재나 그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대하다는 존재로써 우주적인 문제보다는 지구적인 문제나 국가적인 문제에 자신을 한정시키고, 우주에서 독립된 존재인양, 무관한 것처럼,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나我라는 존재가 영원한 것처럼 살아간다.

 

아무리 6경과 6근에 의지하여 12처에 살아가고, 18처에서 살아가는 8만4천의 생각과 삶과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自然인 우주에 그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 한가지 소홀할것이 없으며, 어느 한가지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건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한정시켜서 당장 관련된것에만 관심을 보이며, 이해득실에 따라 善惡과 貴賤을 부여하여, 쓸데 없는 논쟁을 일삼는다.

 

윤회의 고리가 아무리 커다랗고, 길더라도 이 우주안에서 연기의 법칙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축생이 귀중하지 않다거나, 인간의 생활이 좋다거나, 천상의 생활이 더 좋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득실에 관련되 視覺일뿐, 축생은 축생대로의 삶이 존재하고, 천상은 천상대로의 삶이 있으며, 인간은 인간대로의 삶이 따로 존재한다.

 

그렇다 무슨 근거가 축생과 아귀의 삶이 부정될수가 있을것인가? 누가 그러한 계급적인 시작을 우리에게 부여했는가?  우주안에서 연기속에서 존재하는 윤회 또한 진리속에 속하는 것! 그 진리에서 벗어난수 있다는 것은 또한 진리를 부정하는 것.

 

윤회가 나쁘고, 해탈이 좋다는 것은 누구의 관점이며, 기준을 나누는 것은 논쟁의 거리가 될뿐, 실제적인 이득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익을 위해, 우리는 귀중한 현재를 소모할 필요가 있을것인가?

 

그렇기에 과학은 과학으로써, 존재의 진실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어야 할뿐이고, 불교는 그 존재안에서 우리는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것인가? 라는 연기법에 근거한 공동체적 생각을 하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데 중점을 두어야 하는것은 불교가 종교라는 관점에서 재가신자에게나, 수행자인 스님들에게 화두를 잡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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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이전/.... 2009. 12. 25. 17:03
출처 : http://www.ted.com/talks/view/id/548
 
 음 진영대님의 글을 보고서 좋은 부분이라 생각되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진영대님은 우리의 이성적인 부분에서 생각을 하셨지만
저는 이런 이성적인 부분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조절할것인지
아니면 조절을 당할것인지
그리고 조절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방어를 할것이지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실 이 동영상을 보면서 넛지가 생각이 나더군요.
행동경제학이라는 말도 나오고 심리학에 관한 부분도 나옵니다.
 
처음에는 착시현상에 대해서 나올때 심리학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다가 탁자와 큐브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는 상식과 문화에 의해 우리가 생각을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탁자의 착시 현상은 우리가 미술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서 생겼다고 볼수가 있는 것이죠.
이 원근법에 대한 교육은 최근에 일어난것으로 르네상스이전에는 이러한 기법들이 없었습니다.
무슨말이냐면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나 조선시대이전의 한국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착시현상이 없었을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착각은 우리가 평면의 2D를 관념적으로 3D로 이해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우리가 사전에 현대미술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이전의 한국사람들이나 과거의 이러한 교육을 받지 않았던 누구나 2D인 종이에서 3D로 관념적으로 이렇게 착시현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현실에서 착각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그냥 종이의 그림으로만 생각을 했을거라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유추하여 간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이 시스템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옛날 유신치하나 군부정치때 글쓰는 분들이 글을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를 할때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에) 사전심의를 받고 했습니다.
몇번 그러고 나니 사전심의를 받기 전에 스스로 글을 쓰면서 자체사전심의를 하게 되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회적인 생활을 하고 그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가 결정하는 것에 스스로의 자율적인 의지보다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우리를 관찰하고 그에 준하여 결정을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긍정적인 의미로 넛지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 인간의 행동심리는 이렇게 자신의 의지도 있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하는 행동도 있기에 인간의 행동은 어디로 튀지 모르는 공과 같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갈대라고도 하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요즘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개개인에 대한 행동을 파악하기 보다는 동영상에 나오는 것처럼 어쩌면 넛지의 맥락인 전문용어인 '군중심리'에 대해 관심이 가고 있습니다.
 
이 동영상에 나오는 구독자의 선택 부분에 대해서도 그렇고 4분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도 이러한 군중심리라는 전체적인 확률에서 인간의 개개인의 행동이 보인다는 것에 저는 공감했습니다.
 
얼마전에는 EBS에서 군중심리에 대한 실험을 4편에 걸쳐 보여준적이 있는데
학생들이 시험문제에 대한 자기 의사의 관찰에 대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해서 그런 상황이 되면 저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렇기에 모르는게 약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대중에 따라가는 게 쉽지 않을까?
왜 그렇게 안다고 내가 튀어서 세상이 나아질까?
라는 식의 생각을 해봤지만
 
저는 그 기준을 이렇게 구분을 지을려고 합니다.
저의 기준이 남에게나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크게 끼치지 않는다면 대중에게 따라 갈것이고
상황이 나빠져도 어느 누군가가 힘들어질 상황이라면 소신대로 밀어부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것이 어떻게 보면 관점의 차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가치관에 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동영상에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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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에 필요한 자린고비

이전/지혜의 생각 2009. 12. 25. 14:24

우선 흔히 자린고비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하는게 굴비 이야기죠?
아마 이게 제일 먼저 생각이 날겁니다.
워낙 돈쓰는 것을 아까워 하는 나머지 밥하고 간장만 먹다가 어느날 아들이 아버지께 우리도 고기 좀 먹자고 하니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가 선듯 그럼 우리도 고기를 한번 먹어 볼까? 하고 이야기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들이 좋아 했는데 한편으로 의심도 했더라죠. 평소에 안 사주시다가 갑자기 사 주신다고 하니 가족들이 다 놀랬을겁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장에 가셔서 조기를 사 오셨더랍니다.
당연히 가족들은 당연히 놀라는 한편으로 좋았겠죠.
아! 우리도 이제 고기를 먹겠구나...
그렇게 기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조기를 부엌으로 가셔서 요리를 하는게 아니라 천장에 조기를 매다는게 아니겠습니까?
책 보는 저도 생각했었죠.
'뭐 할려고?'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밥먹자' 라고 하시는게 아니겠습니까?
황당!
당연히 아들은 조기를 먹고 싶은 마음에 밥을 먹으면서 계속 쳐다봤겠죠..
그런데 갑자기 그 모양을 보던 아버지..
"어허, 그렇게 계속 쳐다보면 짜워서 밥을 많이 먹으니 한번만 쳐다보고 밥을 먹으라"
하고 말했다는 이야기..

정말 자린고비 이야기의 하일라이트입니다.
조기를 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보는 것 조차 짭게 되고,
그게 밥을 많이 먹게 되니 한번만 보는게 절약하는것이다라는 논리...

그 밖에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가 날아가니 그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고 해서 '저장 도둑놈 잡아라'고 외치며 그 파리를 잡으려고 단양 '장벽루'까지 따라 갔던 일. 

무더운 여름날이 되어 어쩌다 부채를 하나 사 오면 그 부채가 다를까 염려되어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 가서 머리만 좌우 전후로 움직였다고 하는 일. 

하도 고기를 사다 먹지 않기 때문에 동네사람이 어쩌나 보려고 생선 한 마리를 그 집 마당 가운데에 던져 넣었더니,  이를 발견하고는 '이 밥 도둑놈이 들어 왔다'고 법석을 떨며 냉큼 집어 문 밖으로 도로 내던진 일 

자기 없는 사이에 장모가 놀러 왔다가 돌아가는데 인절미 떡을 해서 먹고 약간 을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가는 것을 도중에 자린고비가 보고 펄쩍 뛰면서 그것을 도로 빼앗던 일 등이 자린고비가 행해 온 이력들이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린고비라고 알아 들어실것이다.

그러나 자린고비는 잘못된 고유명사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몰라도
요즘에 자린고비라고 하면
"자린고비의 어원은 '절인고비'이다. 여기서 고비라 함은 숙근성 다년초로 관엽식물인 고비를 말하는 것으로, 고사리와 함께 데쳐 먹는 나물의 대명사로 꼽히는 바로 그것이다."


라는 식으로 잘못된 정의를 내리는가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 국어사전에는
다라울 정도로 인색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

 이라고 적혀있고
흔히 고사라고 밝히는 곳에서도
구두쇠의 대명사 玼吝考妣(자린고비)는 원래.‘절인고비’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考妣(고비)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이고,여기서는 제사 지낼 때 쓰는 紙榜(지방)을 의미한다. ’지방‘은 원래 제사가 끝나면 불사르게 되어 있으므로, 제사 때마다 종이를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그 종이가 아까워서 한번 썼던 것을 기름에 절여서 두고두고 다시 쓰는 사람이 있어, 그를 ’절인 고비(考妣)라고 불렀다가 變音(변음)하여 ‘자린고비’가 되었다고 한다

라고 하지만 자린고비의 정확한 유래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또한 이것이 설화인지, 동화인지 조차도 구별을 할수 있는 사람은 더욱 더 드물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던중에 12월23일 느티나무 172회 - '나누기 위한 절약 - 자린고비 조륵'  (밤10시50분)
에 했던 역사 한편을 보고서 문헌을 찾아보니 이 인물이 살아있었던, 그리고 역사에 기록이 된 인물이라고 알게 되었다.

성함은 조륵이라고 하였으며 한영조씨의 일가이고 지금은 그후의 10대손이 살아있고 족보도 전해 온다고 한다. 한때 조선 제일의 자린고비로 불렸던 조륵(1649~1714)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사람으로, 근검절약하여 큰 부자가 된 뒤 어려운 백성들을 많이 도와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일)까지 받았다고 한다

전해 오는 것의 문헌은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서 채록하여 1982년에 출간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음성군-』에 수록하였다. 『음성군지』『음성의 구비문학』 등에도 실려 전한다.

그러한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 와전이 되어 악명의 이름으로 자린고비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는 모호하나
이분이 처음부터 그렇게 된것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신분은 양반가문이나 불우한 환경으로 이렇게 저렇게 떠 돌아다니다 어느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달걀을 하나 얻었다가 이것을 암닭에게 품게 하였더니 이것이 병아리가 되고 이것이 암닭이 되어 이것이 계기가 되어 커다란 부를 얻게 되었다. ( 작은 재산을 큰 재산으로 불림)
그때 그분은 " 분하거든, 너도 복을 타고 나거라" 라는 말은 하는 것으로 부를 이루는데 절약이 습관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부는 자신이 이루는게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거 같다.

또한 이분에 대한 설화는



이렇게 일전 한 푼도 남에게 주거나 빌려주는 일이 없고, 인정도 사정도 눈물도 없이 모으고 또 모으다 보니 근동에서는 둘도 없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렇게 자린고비로 방방곡곡 소문이 날 대로 난 어느 날, 전라도에서 유명한 자린고비가 찾아와서 “조선생, 나도 전라도에서는 소문난 구두쇠인데, 어느 정도 구두쇠여야 큰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륵전라도 구두쇠가 묻는 말에 쓰다 달다는 말도 없이 한참을 있다가, “그러면 나와 같이 나갑시다.” 하고는 전라도 구두쇠를 데리고 충주 탄금대까지 갔다. 가는 길에 전라도 구두쇠는 신발을 아낀다고 교대로 한짝은 신고 한짝은 들고 가는데, 조륵은 아예 신발 두 짝을 모두 들고 갔다. 그것만 봐도 조륵이 한 등급 높은 자린고비가 분명했다.

조륵탄금대에 오르자 전라도 구두쇠한테, 시퍼런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강물 쪽으로 뻗은 소나무가지에 매달리라고 하였다. 전라도 구두쇠는 영문을 몰랐지만, 큰 부자가 되고 싶은 일념에 소나무가지에 매달렸다. 그러자 조륵이, “이제 한쪽 팔을 놓으시오.” 하였다. 그대로 따라했더니 한참 후에, “됐소. 이젠 한쪽 팔도 놓으시오.” 한다. 전라도 구두쇠는 시퍼렇게 질려서, “아니, 그러면 저 강물에 빠져죽지 않습니까?” 하고 소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몇십 길 되는 낭떨어지 밑에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치며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전라도 구두쇠는 얼른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붙들더니 죽을 상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제야 조륵은, “그러면 이제 올라오시오.” 하고는, 전라도 구두쇠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나뭇가지에서 벗어나자, “큰 부자가 되려면 예사로운 구두쇠 정도로는 안 됩니다. 방금 전 나뭇가지에 매달려 죽게 되었을 때의 순간을 잊지 마시오. 만사를 죽기를 각오하고 실행한다면 목적한 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오.” 하고 말했다. 전라도 구두쇠는 조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전라도 구두쇠는 조륵의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몇 년을 내버려두었는지 창구멍이 뚫어져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전라도 구두쇠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창호지 조각을 꺼내어 저녁밥을 먹을 때 남긴 밥풀 몇 알을 붙여서 대강 창구멍을 가리고 잤다. 그러고는 아침에 조륵의 집을 나서면서, “조공! 문에 발랐던 종이는 내 것이니 뜯어 가렵니다.” 하였다. 조륵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암요, 떼어 가시오.” 하였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자린고비 생활을 하던중 어느날 나라에 흉년이 들고 환갑이 다되어 가던중
족제비가 암닭을 물고가는 사건이 생긴다.
평소에 부는 하늘이 주신거라는 생각을 하던중 이 사건이 벌어지므로 해서 조륵은 이제 내가 어렵게 쌓은 부를 베풀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내가 잘 살려고 구두쇠 노릇을 한 것이 아니고, 내 평생의 사업으로 실천해 온 것이며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난 것이요


라며 환갑때 그 해에 가뭄에 시달리던 지역주민 1만호에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이에 평소의 구두쇠 행각을 유심히 보아 벌을 내릴려고 했던 조정에서는 이런 선정에 감동하여 벼슬을 내릴려고 했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빈털털이로 세상을 하직하면서 자식들에게는 이제 너희는 너희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하였다고 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그 지역주민들이 감동하여 '자인고비(慈仁考碑)라는 비석을 세워주게 되었는데 어버이같이 인자한 사람을 위한 비석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자인고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선사업가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비롯 어렵게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근원은 사회에서 벌은 것이기때문에 사회환원을 생각하고 그것을 극적으로 실천한 인물,
그분이 조륵이다.

인터넷이나 여러 책들을 보면 자린고비에 대해 부쩍이나 많이도 나옵니다.
그러나 이 고사성어의 진실한 뜻은 절약정신에 의거한 사회환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하는 곳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이 어떻든간에 현대에 와서 이렇게 고착되었다고 막쓰는 것을 나무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렇게 진실이 왜곡이 되었는 것도 알면서 그냥 넘어가는 것도 아쉬운것이 있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요즘은 경제에 관념에 대한 책도 많이 나오고,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환테크니 하는 돈버는 책은 불티나게 팔리는 요즘,
돈을 왜 버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에 대해서 나오는 책도 드물고 찾는 이도 없는 이 시대에
조륵에 대한 이분의 실천적인 사회봉헌에 다시끔 내 자신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고, 이 글을 보시는 분도 한번 생각해 보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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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오카 마사히로의 육중관

이전/.... 2009. 12. 20. 21:16

死中有活(사중유활) : 정말 벼랑으로 몰린 위기 속에 삶이 있다. 

      궁즉변 변즉통 (窮卽變  變卽通) 역경에 나온 말로 궁하고 궁해서  더이상의 뒷받침이 없을때 비로서 어디선가 변화의 기운이 생겨 통하게 된다는 뜻,
  즉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때 비로서 자기의 개혁과 혁신이 일어나 스스로 일어나거나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는 것!

苦中有樂(고중유락) : 괴로움 속에 비로소 낙이 있다. 노고가 없는 곳에 즐거움이 없다. 
       무조건 즐겁게 지낸다고 즐거운것도 아니며 마냥 힘들다고 해서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힘들고 즐겁게 지내는 것은 마음에 달린것이니 또 원체 인생은 그런것이니 현재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忙中有閑(망중유한) : 참다운 한가로움이란 번거롭고 매우 바쁨속에 있다. 

         =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수 있으나 저는 바쁜 와중에도 반드시 챙길것은 챙기라는 말인것 같습니다.
           즉, 가족을 챙긴다든지, 독서를 하라는 말, 운동을 하라는 말, 대인관계를 넓히라는 말과 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을 놓치지 말라는 말도 됩니다.

壺中有天(호중유천) : 세속적 생활 속에서 스스로 창출하는 별천지. 사람은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만의 내면세계를 만들 수 있다. 
       중국의 고사성어에서 나온말로 항아리속에 하늘이 있다는 말로 자기의 가치관이라든지 자신만의 안신처를 가져야 한다는 뜻    =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잃는 것과 같다.

意中有人(의중유인) : 제 마음속에 사람이 있다. 사숙(私淑)할 수 있는 인물을, 혹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
         가르침을 받을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간상, 내가 쓸수도 있고 추천해 줄수 있는 사람

腹中有書(복중유서) : 단편적인 지식이 아닌 철학과 신념을 뱃속에 간직하고 있다 
지식(知識)이란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어서 얻는 아주 초보적인 것이므로 얄팍하다. 일종의 데이타에 불과하다.  여기에 경험과 학문이 쌓이면 <견식 見識> 이된다.  경험에 비춘 자기만의 가치관이 형성되어 사물을 바라본다는 말,       흔히 프레임<frame>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가진다말과 같다.   이에 다시 이 견식에 결단력과 실행력이 덧붙여지면 <담식 膽識 >이 된다.    즉,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것을 결정한 이상 실행에 욺기면서, 그 상황에 맞추어서 결과를 해내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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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이전/.... 2009. 5. 12. 17:46
"작은 일이 큰 일을 이루게 하고, 디테일이 완벽을 가능케 한다."
휴렛패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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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과정

이전/말한마디 2009. 5. 10. 11:44
쇼펜하우어---
모든 진실을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 비웃음
둘째, 격렬한 반대
셋째, 스스로 진실을 입증해서 사람들이 수용하게끔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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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할것인가?

이전/.... 2009. 4. 13. 01:16
그동안 많이 바빠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인 2009년 1/4분기를 그냥 보내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나 나름대로의 일에서 어느정도의 성과는 있었지만 여전히 전체적인것은 답보상태에 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있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해결해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만의 문제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끼리의 문제는 나만의 문제해결방식으로는 절대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즉 나만의 방식일뿐 동의나 이해는 있어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변화를 이끌지는 못하는 현실에 부딪힌다.

아무리 나에게는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힘든일일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단순한 일일뿐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다.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그 사람은 그 나름대로 부족하더라도 만족하고 산다.
어쩌면 미천한 개미이고 사람에게 밣혀죽을수 있는 곤충일지라도 어쩔수 없다는 듯이 삶을 포기하고, 그렇게  살다가 밣이면 어쩔수 없지 하는 것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어쩔수 없는 삶이 그렇게 만들었고 또한 그와 크지나 영역이나 환경이 다를뿐 나도 나 나름대로의 한계적인 상황에 자신만의 크기를 정하고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요즘에 자꾸 나오는 라디오의 멘트처럼 반복된 생활환경의 부딪침속에 어느새 내 자신만의 감옥을 스스로 만들고 언젠가는 사라질 장애를 견디지 못하고 그냥 좌절을 운명처럼 느끼고 살지 않는지 다시 반성해 본다.

나는 아직 죽지도 않았고 좌절할 만한 것도 갖지를 않았다.
또한 그렇게 살기도 싫다.
나만의 인생에서 실패라는 것은 나는 인정할수도 없고 인정해서도 안된다.
나는 진화하고 그리고 결국은 성공할것이라는 것을 나는 느끼고 또한 그렇게 실천할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기를 좋아한다.
라는 말은 나는 믿는으며 오늘을 더욱더 사람들속에서 힘차게 살아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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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멈추는 날 ★★☆☆☆

이전/Movie 2009. 4. 13. 00:07
지구가 멈추는 날
감독 스콧 데릭슨 (2008 / 미국)
출연 키아누 리브스, 제니퍼 코넬리, 제이든 스미스, 캐시 베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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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괴짜 같은 영화!!!
인간이 어쩔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인간이기때문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말도 안된는 괴변으로 점철된 영화.!!!

컴퓨터 그래픽 빼고는 스토리나 나머지는 별거 없음.
정말 할 일 없으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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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 루시힐 ★★☆☆☆

이전/Movie 2009. 4. 12. 22:34
미쓰 루시힐
감독 조나스 엘머 (2009 / 미국)
출연 르네 젤위거, 해리 코닉 주니어, 시옵한 폴론, J.K. 시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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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르네 젤위거가 나왔다고 해서 그냥 본 영화..
그나마 넘겨보기 신공으로 봤지만 실망한 영화..
감독은 경영이나 경제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
아님은 영화팬들의 수준을 무시하거나...

정말 할일 없으면 한번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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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 (Echelon Conspiracy, 2009) ★★★☆☆

이전/영화 2009. 4. 12. 22:31
기프트
감독 그렉 마크스 (2009 / 미국)
출연 쉐인 웨스트, 에드워드 번즈, 빙 라메즈, 마틴 쉰
상세보기

음 여전히 IT관련 영화는 처음에는 기발하다가 나중에 결말은 SF적으로 끝난다는 것을 잘보여준 영화라고 할수가 있겠슴....

초반에 어느정도 아이디어는 좋아서 몰입도가 좋았지만 종반부터 초점자체가 미스테리하가 전개되다가 나중에 이상하게 억지로 결론을 짓는 것으로 끝남. (마지막에 반전이라고 해 놓은 것도 마음에 안듬)

뭐랄까?
핵심은 이제는 인간이 기계에도 인생을 맡겨도 기계가 더 인간적이기때문에 불안전하고 이기심이 많은 인간보다 낫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함...

뭐 오랜만에 그런대로 끝까지 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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