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열전

이전/고전 2008. 4. 16. 23:41

사마천 사기'史記' 중 '伯夷列傳 (백이열전)'

原文:
                                         伯夷列傳    史記


 

  夫學者載籍極博,猶考信於六藝;詩書雖缺,然虞、夏之文可知也。堯將遜位,讓於虞
舜、禹之間,岳牧咸薦,乃試之於位。典職數十年,功用旣興,然後授政。示天下重器,王
者大統,傳天下若斯之難也。而說者曰:「堯讓天下於許由,許由不受,恥之逃隱。及夏之
時,有卞隨、務光者。」何以稱焉太史公曰:余登箕山,其上蓋有許由冢云。孔子序列古
之仁聖賢人,如吳太伯、伯夷之倫,詳矣。余以所聞,由光義至,高其文辭不少槪見,何哉
     孔子曰:「伯夷、叔齊,不念舊惡,怨是用希。」「求仁得仁,又何怨乎」余悲伯夷
之意,睹軼詩,可異焉。其傳曰:「伯夷、叔齊,孤竹君之二子也;父欲立叔齊。及父卒,
叔齊讓伯夷。伯夷曰:『父命也。』遂逃去。叔齊亦不肯立而逃之;國人立其中子。於是伯
夷、叔齊聞西伯晶善養老,『盍往歸焉!』及至,西伯卒,武王載木主,號爲文王,東伐紂
。伯夷、叔齊叩馬而諫曰:『父死不葬,爰及干戈,可謂孝乎以臣殺君,可謂仁乎』左
右欲兵之。太公曰:『此義人也。』扶而去之。武王已平殷亂,天下宗周;而伯夷、叔齊恥
之,義不食周粟,隱於首陽山,采薇而食之。及餓且死,作歌,其辭曰:『登彼西山兮,采
其薇矣!以暴易暴兮,不知其非矣!神農、虞、夏,忽焉沒兮;我安適歸矣于嗟徂兮,命
之衰矣!』遂餓死於首陽山。」由此觀之,怨邪非邪
  或曰:「天道無親,常與善人。」若伯夷、叔齊,可謂善人者非邪積仁絜行,如此而
餓死。且七十子之徒,仲尼獨廌顔淵爲好學;然回也屢空,糟糠不厭,而卒蚤夭。天之報施
善人,其何如哉盜跖日殺不辜,肝人之肉,暴戾沎,睢聚黨數千人,橫行天下,竟以壽終
,是遵何德哉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若至近世,操行不軌,專犯忌諱,而終身逸樂,富
厚累世不絶。或擇地而蹈之,「時然後出言」,「行不由徑」,非公正不發憤,而遇禍災者
,不可勝數也!余甚惑焉。儻所謂天道,是邪非邪
  子曰:「道不同,不相爲謀。」亦各從其志也。故曰:「富貴如可求,雖執鞭之士,吾
亦爲之;如不可求,從吾所好。」「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擧世混獨,淸士乃見。豈
以其重若彼,其輕若此哉「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賈子曰:「貪夫徇財,烈士徇名,
夸者死權,衆庶馮生。」「同明相,照同類相求。雲從龍,風從虎。聖人作而萬物睹。」伯
夷、叔齊雖賢,得夫子而名益彰;顔淵雖篤學,附驥尾而行益顯。巖穴之士,趨舍有時;若
此類,名堙滅而不稱,悲夫!閭巷之人,欲砥行立名者,非附青雲之士,惡能施於後世哉!




천도天道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뜻이란 사사로움이 없으며 언제나 착한 사람 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백이와 숙제는 과연 착한 사람이었는가?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을 바르게 했음에도 마침내 굶어 죽은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옳고 그름이란 무엇인가?

 

또 한 공자는 일흔 명의 제자 중에서 안연(顔淵)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항상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고 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지불하는 대가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盜?)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쳐 먹었다. 잔인한 짓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러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평생 동안 하는 짓이 못되고 남에게 해코지만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하고 죽은 후에도 그 부귀가 자손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고 즐겁게 살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들 오늘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에도 때를 기다려서 하며, 길을 갈 때는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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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사마천의 사기 중 70열전의 첫 번째 열전인 백이열전의 한 내용이다.

역사 속에 살다간 인물들을 예로 들어 궁형으로 치욕과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마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자 한 것이며, 천도(天道 하늘의 뜻)란 과연 있는 것인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한 것이다. ("사마천과 사기에 관하여"란 글을 꼭 읽으시길 바랍니다.)

 

  성경 "시73:1~17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 ...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 ...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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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史記' 중 '伯夷列傳 (백이열전)'본 내용

 

백이열전은 70편의 열전 중 첫 번째 편으로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 백이와 숙제의 고매한 인품을 허유, 무광과 대조, 대비시키면서 그려 나가고 있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 공자의 칭찬에 의한 것임을 언급하면서 70열전의 인물들이 자신의 붓끝을 빌려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김득신이 1억 1,300번(11만3천 번)이나 외웠다는 이편을 불과 1000자도 못 되지만, 10여 명이나 되는 역사 인물을 다루고 있다. 즉 백이열전이지만, 백이에 대한 기록은 겨우 215자에 그칠 뿐이고, 나머지 4분의 3은 저자 자신의 논설이다. 그의 관점은 이렇게 요약된다.

 천도(天道)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면서 인간사의 불공정한 여러 형태에 대한 회의를 품는다. 천도의 기본은 권선징악이지만, 사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아 착한 사람이 재앙을 입고 나쁜 사람이 복을 누리는 것이 세상의 이치[世道]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공자가 백이와 숙제 두 사람에 대해 인(仁)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다라고 한 칭찬을 의문시한다. 백이와 숙제가 남긴[채미가]의 내용이나, 이 두 사람이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죽은 것으로 볼 때 원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겸양의 미덕을 강조하고, 다툼을 꾸짖었다. 한나라 초,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사이의 심각한 이권 다툼 속에서 백이와 숙제가 부귀영화를 마치 뜬구름에 비유하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모습은 단연 돋보였을 것이다.

 

 사마천은 단순히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의 행적을 적었다기보다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총괄적인 입장을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다.

 ['인(仁)'은 공자에 의해 최고 원리로 제기된 이래 유가 사상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개념은 물론 공자 이전에도 쓰였고, <논어>에서도 똑 같은 의미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공자는 "인이란 것은 사람다움이다",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보면 '인'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인'의 실천 방법으로 '효(孝)', '제(悌)', '충(忠)', '서(書)', '예(禮)', '악(樂)' 등을 제시했다.]

 

왜 유가 경전에는 허유와 무광 등의 사적이 없을까?

 

 무릇 학자들이 기록한 책은 매우 많으나 믿을 만한 것은 육경(六經; <詩經>, <書經>, <禮記>, <易經>, <春秋>)에서 찾을 수 있다. <시경>과 <서경>에도 없어진 곳이 있기는 하나, 우(虞)나라와 하(夏)나라 시대의 일은 알 수 있다.

 

 요(堯)임금은 순(舜)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주었고, 순임금은 우(禹)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 주었다. 이때에는 사악(四嶽; 요순시대 사방 제후들의 우두머리)과 12주의 목(牧; 각 주의 행정 장관들)들이 다 함께 우를 추천하였으므로, 시험 삼아 벼슬을 주고 수십 년 동안 정치를 맡겨 공적이 이루어진 다음에 군주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러한 절차를 밟는 것은 천하는 소중한 그릇이며, 왕은 가장 높은 통치자이므로 천하를 전해 주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요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자, 허유는 받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말을 들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달아나 숨어 버렸다. 또 하나라 때에는 변수(卞隨)와 무광(務光)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세상 사람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일까?"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기산(箕山)에 올랐을 때, 그 위에 허유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공자(孔子)는 옛 인인(仁人), 성인(聖人), 현인(賢人)들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오태백(吳太伯), 백이와 같은 사람을 매우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나는 허유와 무광이 절개와 의리가 몹시 고결한 인물들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시경>과 <서경>의 문장에는 그들에 관한 대략적인 기록조차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백이와 숙제는 과연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공자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과거의 원한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했고, 또 "그들은 인(仁)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하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으로 본다. 그들의 일시(<시경>에 실려 있지 않은 시) [채미가(采薇歌)]를 보면, 공자의 말과는 다른 데가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렇게 적혀 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인데, 그들의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할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달아나 버렸고,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고죽국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둘째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 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西白昌)이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창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의 아들 무왕(武王)은 선왕의 시호를 문왕(文王)이라고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은나라 주왕(紂王)을 치려 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무왕 곁에 있던 신하들이 무기로 그들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 때 태공(太公: 제나라의 시조인 여상(呂尙))이 [그들을 두둔하여]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이에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냈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지조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주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우, 하나라 시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이들은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이 노래로 미루어 본다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건만 굶어죽었다.

 

 또한 공자는 일흔 명의 제자 중에서 안연(顔淵)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항상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고 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盜?)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쳐 먹었다. 잔인한 짓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 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것은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다.

 

 최근의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고 즐겁게 살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에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파리도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 길을 갈 수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길[道]이 다른 사람과는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기의 뜻을 좇아서 행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공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할 것이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 행할 것이다."

 "추운 계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다 흐려졌을 때 비로소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 어찌하여 [세속 사람들은] 그토록 부귀한 사람을 중시하고 깨끗하고 맑은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것일까?

 공자는 말했다.

 "군자(君子)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

 

 가의(賈誼: 한문제 때의 정치가, 문인)는 이렇게 말했다.

 "탐욕스런 자는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는 이름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서민들은 그날 그날의 삶에 매달린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 어울린다."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이처럼 성인이 나타나야 세상 만물도 다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백이와 숙제가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 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이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갈 수 있는 것처럼 공자의 칭찬을 받아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바위나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은 일정한 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명성이 묻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시골에 묻혀 살면서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도,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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