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의 부자아빠 만들기-77] 금호그룹 윤생진 상무의 이야기

카테고리 없음 2007. 2. 5. 22:31

[세이노의 부자아빠 만들기-77] 금호그룹 윤생진 상무의 이야기

고졸 생산직 출신으로 일곱번의 특진을 거쳐 금호그룹의 상무가 된 윤생진씨에 관한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으시면 '미치게 살아라' (윤생진 저, 출판사 연합뉴스)를 참고하세요.


나는 1978년 봄에 생산 현장의 고졸 기능직 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현장으로 배치되기 전, 인사과에서 잠시 면담을 했다.

“당신은 꿈이 무엇입니까?”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제 꿈은 금호 타이어에서 부장이 되는 겁니다.” 주위는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내게 한 간부가 다시 물었다. “윤생진 씨, 혹시 반장을 부장으로 착각한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는 꼭 부장이 될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능직 출신 중에서는 그때까지 단 한 명의 주임도 나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조장, 반장, 주임, 대리, 과장, 차장, 부장…. 기능직 사원에서 출발해 과장이 되려면 단 한번의 승진 누락이 없다 해도 꼬박 30년. 아무리 날고 기어도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얘기.

그때서야 나는 사람들이 왜 나를 비웃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턱없이 높은 현실의 벽을 비로소 깨달았다.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나는 다짐했다. ‘아무도 할 수 없다면 나야말로 할 수 있어!’

가진 것이라곤 오직 몸뚱이 하나와 깡다구뿐이었던 터라 ‘최고가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단순한 논리에 운명을 걸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꼴찌 인생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이 쉴 때 공부했고, 남이 잘 때 머리띠를 동여매고 아이디어와 씨름을 벌였다.

내가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올라갈 때마다 주위의 동료들은 한없이 부러운 시선과 함께 시샘의 눈길을 던졌다. 단순히 운이 좋은 녀석이라고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피나는 노력이 일궈낸 결과라고. 심지어는 책상 앞에 증명사진을 붙여놓고 그 밑에다 깨알만하게 ‘윤생진 부장’이라는 글씨를 써넣을 정도였다.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었다. 부장이 되겠다는 목표가 나에게는 삶이고 운명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었을 따름이다.

모두가 황당하다고 여겼던 부장의 꿈은 정확히 16년 만에 이루어졌다. 1만8천6백건의 아이디어를 제출해 ‘금호 제안왕’과 ‘전국 제안왕’을 차지했으며, 대통령상 5회, 사장 표창 52회의 기록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후 일곱 번의 특진을 거듭한 끝에 2000년도에 금호그룹 전략경영본부 상무가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상무로 첫 출근하던 날, 하늘에선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가슴속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희망이 솟아올랐다. 기적이었다. 현장에서 고무 냄새를 뒤집어쓴 채 일하던 사람이 그룹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부서에서 상무까지 올라섰다는 것은 당연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뱃고동이 울리는 뱃전에 기대서서 담배꽁초를 입에 문 채 쓸쓸하게 흑산도를 떠나오던 일, 입사 직후 개선을 한답시고 제안했던 아이디어가 대량 불량을 일으켜 경위서를 썼던 일, 어용으로 몰려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던 쓰라린 기억, 시기, 질투, 모함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어느새 두 뺨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50여 년이 넘는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면 웬 고비가 그리도 많았나 싶다. 나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안주하고 싶고 지칠 때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갖고 미친 듯이 운명과 맞서 싸웠다.

어쩌면 나는 열정을 타고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는 것보다 훨씬 값진 선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확신한다. 목표와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는 걸.



윤상무는 지난 83년 타이어 완제품 가류기(열 압력 등을 통해 타이어 완제품의 형태를 만들어 주는 기기)의 작업공정 개선방안을 내놓아 공전 의 히트를 쳤다. 당시 가류기는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에서 100% 수입하고 있었는데, 윤 상무(당시 현장대리)는 공정 수순을 바꾸는 개선안을 사측 에 제안했다. ‘어딘가 허점이 있을 것이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면밀히 분석ㆍ검토한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간부들은 “일본 업체가 그것을 몰랐겠느냐”며 오히려 조롱했 다. 윤 상무는 3개월간 설득작업 끝에 기어이 공장장을 찾아가 “한 대 만 시험해 보겠다”며 모험을 걸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공정 개선으로 타이어 한 개(본)를 만드는 시간을 10초나 단축해 연간 2만개를 더 생산하는 효과를 낳았다. 전체 투자비 12만원으로 연간 20억원 이상의 추가 생산효율을 거두게 된 것.

회사가 그를 그냥 둘 리 만무했다. 78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 생산직 사원으로 입사한 고졸학력의 윤반장-윤주임-윤대리를 1월 윤차장으로 2계급 특진시킨 것이다.

기발한 그의 제안과 품질관리 능력에 반해버린 금호그룹 박성용회장의 특별배려였다.

그는 남들은 한번도 힘들다는 특진을 무려 일곱번이나 거듭하며 20여년 만에 그룹 상무 자리에 올랐다. 고졸 출신의 생산직 근로자가 그룹 상무를 맡게 된 것은 30대그룹 중 금호가 유일무이하다.

박 회장은 이를 모범으로 삼겠다며 공장에 윤 상무의 이름을 새긴 나무를 기 념으로 심어 줬다. 실제로 금호타이어공장에는 윤생진 기념비와 윤생진 기념식수까지 있을만큼 그는 생산직 사원들의 우상이자 자극제다.

회사 입장에서도 윤씨는 '움직이는 광고판'이다. 이달중에만 전국 17개 기업체가 그를 초청했고, 강단에서 윤씨는 자신의 직업관을 전파한다.

 "직장인의 우상이라는 이명박 의원도 한번에 2직급을 승진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나는 흑산도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쳤을 뿐이다. 현대와 삼성쪽 간부들이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진짜 차장이냐고. 어떻게 그런 인사 파괴가 있을 수 있는가 못내 미심쩍어 한다. 하지만 사실이다. 학력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모든 근로자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었다고 자부한다."

윤 상무는 이후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회장의 주목대상이 됐다. 고 박 정구 전 회장은 윤 상무를 자주 불러 술을 마시곤 했다.

그 자리에서 직 접 손으로 안주를 집어 윤 상무를 먹여 주면서 “더 분발하라”며 격려 하곤 했다. 윤 상무는 이 같은 총애를 잊지 못해 지금도 박정구 전 회장 의 사진을 문 앞에 두고 출퇴근할 때마다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다고 한 다.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발견해야 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 다. 실패를 하더라도 좌절할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만회하겠다는 의 지를 불태워야 한다”는 게 그의 비결이다.

그는 또 모험심, 문제의식, 실천능력을 통해 자신이 지닌 능력을 극대 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일단 자아를 발견하면 두려움이 없어지면서 자신감이 붙는다. 긍정적 으로 살아가는 탄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현재 그룹회장실 내 품질경영팀을 이끄는 윤 상무는 에너지 절감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연간 100억원 줄이기를 목표로 삼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그의 ‘직장인 성공학’ 첫번째 비결은 끊임없는 아이디어 제안이었다.

그는 입사 이후 하루 4시간이상 자본 적이 없으며 10년 가까이 TV연속극을 본 일도 없다고 한다. 항상 호주머니에 쪽지를 넣어가지고 다니며 그때 그때 생각난 것을 메모하곤 했다.

“구내 식당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따로 반납할 것을 제안, 설거지 시간을 단축했더니, 덕분에 30억원의 원가절감을 이뤘습니다. 그런가 하면 타이어생산공장라인을 단순화시키는 아이디어를 내 연간 2만개의 타이어를 더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8년 입사후 16년간 현장에 있으면서 2만여건에 가까운 아이디어를 제출, 제안분야에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그는 ‘움직이는 아이디어 뱅크’로 통한다. 제안분야에서 1인자가 되어버린 그는 그간의 경험 등을 모아 ‘개선제안만들기’ ‘아이디어 만들기’라는 책을 출간, 사내 교과서처럼 쓰이기도 했다.

그의 부지런한 아이디어 제안은 여러가지 상도 가져다주었다. 83년 한국 최고의 품질관리 전문가와 한국 최고의 개선제안 전문가로 선정돼 석탑산업훈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금호그룹 최우수제안왕상을 수상했다. 91년엔 한국방송공사의 무역역군상, 93년엔 대통령 최우수상과 픔질명장 등 사내외 모두 합쳐 50여개의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의 ‘직장인 성공학’ 또 하나의 비결은 몸관리다. 그는 요즘도 매일 한시간씩 체력 단련에 투자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건강할 때 떠오르기 때문이다.

남들 같으면 은퇴를 바라보는 50대 중반의 윤생진 상무. 그는 “오기와 열정이 생의 에너지였다”면서 자신의 일에 정열을 쏟으며 ‘미치게 사는 것’이 바로 ‘은퇴없는 인생’이라고 말했다

"누가 나에게 특별한 성공 철학이 뭐냐고 물으면

첫째, 운명을 바꾸려면 미쳐야 한다(열정)
 
둘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자신감)
 
셋째, 하루 4시간 이상은 자지 않는다(공부)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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