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에 이르는 열가지 습관



행복에 이르는 열 가지 습관

저자
Sujin Boriharnwanaket 지음
출판사
비움과소통 | 2013-04-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일반인과 수행자를 위한 행복 지침서 괴로움의 소멸과 열반에 이르...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내가 생각하기로는 모든 이치는 하나로 꿰뚫어져야 이해도 빠르고 실천도 가능하다.

여기 10바라밀은 열가지 습관으로 말하고 있지만 소부의 소송 및 불소행장에 의거해 설명하고 있으나, 전체적 느낌은 딱딱 끊어지는 느낌은 강하다고 본다.


그래서 내용상에는 이어지고 서로상관관계에 있다고 보지만 실제로는 이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이상하게 느낀다. 아마 번역상의 문제도 있을 것이라고 보지만, 내용상에 좀 문제가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해본다.


한번은 참고 삼아 읽어 볼수는 있겠으나, 蛇足이라는 느낌이 강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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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어런스 ★★★★


인듀어런스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캐롤라인 알렉산더 (뜨인돌출판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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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이 잘 잡힌책
얇은 책속에 많은 것을 담았으나 어느 곳에 편중되지 않아 군더더기가 없는책.
섀클턴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우선 이 책을 읽고 접근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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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람들 ★★★★

그리스 사람들(브라보시리즈 4)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베르나르도 로고라 (사계절,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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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사진이나 우리가 알만한 문헌이 나와있지 않고 내용도 얇은 편이지만 구성상 그리스의 전반적인 역사나 문화를 간략하게 잘 설명하였다.

깊지 않기에 오히려 내용이 더 좋았다고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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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굶주리게 하는가?

제네바의 은행가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 (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p163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중에서 (갈라파고스)
지금 세계에는 63억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을 100이 사는
마을로 축소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100명 중
52명은 여자이고
48명이 남자입니다.

30명은 아이들이고
70명이 어른들입니다
어른들 가운데 7명은 노인입니다

90명은 이성애자이고
10명이 동성애자입니다

70명은 유색인종이고
30명은 백인입니다.

61명은 아시아 사람이고
13명은 아프리카 사람
13명은 남북 아메리카 사람
12명은 유럽 사람
나머지 1명은 남태평양 지역 사람입니다.

33명이 기독교
19명이 이슬람교
13명이 힌두교
6명은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5명은 나무나 바위 같은 모든 자연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4명은 또 다른 종교들을 믿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17명은 중국어로 말하고
9명은 영어를  8명은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6명은 스페인어를, 6명은 러시아어를,
4명은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들을 모두 합해도 겨우 마을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반은 벵골어,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합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일들을 안다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 죽기 직전이고
그러나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중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입니다.
74명이 39%를,
20명이 겨우 2%만 나눠가졌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은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았고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에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소유한자는
100명 중 7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마을사람들 중 1명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도 읽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괴롭힘이나 체포와 고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48명 보다 축복받았습니다.

당신이 만일
공습이나 폭격, 지뢰로 인해 다치거나 죽고
무장단체의 강간이나 납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지 않은 20명 보다 축복받았습니다.

1년 동안 마을에서는 1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2명의 아기가 새로이 태어나므로
마을 사람은 내년에 101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하세요
당신은 결코 상처받아 본적 없는 것처럼 사랑하세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춤을 추세요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노래하세요
땅 위의 천국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세요

먼저 당신이
사랑하세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당신과 다른 모든 이들을

이 편지를 읽는다면 그 순간
당신의 행복은 두 배 세 배로 커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당신을 생각해서
이 메일을 보내준 누군가가 있을 뿐 아니라
글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지금 당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돌고 도는 것은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다고

진정으로 나, 그리고 우리가
이 마을을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다면
정말로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갈라 놓는 비열한 힘으로부터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실 예전에 이 글을 보면서 저 마을의 상위 20%에 드는 저를 보면서 저는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사람들은 되살려 기억을 했지만 이내 그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이책을 보면서 다시금 나머지의 80%의 사람들은 다시금 기억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책은 저자의 감정적인 부분이 많아서 이 책 자체에서도 모순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책에서 우리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은 100명의 마을에서 나오는 80%의 가난한 사람보다는 더 힘든 가축보다 생존을 보장받기 힘든 20%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책에서도 빈곤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구조적인 기아에 대해서 논하고 있고 그 문제의 중심에는 다국적기업과 그 해당 국가의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주로 아프리카를 주로 다루고 있죠.
 
다른 이야기들은 이 얇은 책을 조금만 읽어보시면 알수 있으니 생략하고,
 
무엇이 이런 구조적인 기아에
수억명의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그 사람들을 도와줄 여력이 있는 우리가
굶주린 그들을 수수방관하면서, 그렇게 맥없이 그사람들이 죽는 현실을 외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우리가 살아가게끔 할수 있을까요?
 
 
그 것의 답은  이책의 후미에 나오는 부분으로 그 중심에는 사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승리자의 목소리라고 하는 신자유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들은 그 시장의 논리에서의 패배자이며 인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시장이라는 정글에서 아무리 먹고 먹히는 관계일지라고
배부른 사자는 다수의 영양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희생된 다른 영양들이 오히려 안심하고 살아갈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러한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 100명의 마을이라는 동네를 1명채 되지도 않는 반의 반에 또 다시 반에 그 반에 반의 사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탐욕의 끝은 어디까지인가요?
과연 저들의 재산의 수위가 어디까지 올라가는 것을 우리는 부러움의 대상으로만 인식을 해야 하는 걸까요?
 
효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일까요?
 
쓰나미로 질병에 고통받고 있는 아시아의 나라에 쓰레기 의약품을 내다버리듯 구호하는 일본과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
그들은 과연 선진국이라고 본받을만한 나라인가요?
그들은 무작정 여과없이 그대로 따라할 만한 나라인가요?
 
그들의 사상은 승리자의 사상입니다.
플라톤의 사상도 그렇고 다른 여타 서양 사상가들은 승리자의 사상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가 노동자의 사상인 사회주의가 나오면서 서양의 역사는 반성하게 됩니다.
 
서양의 민주주의의 모태라는 그리스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었던가요?
투표권자인 그리스 남성이 1명이라면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는 여자와 노예가 얼마나 있었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모르셨겠죠.
아테네의 그때 시민의 인구는 8만명선.
노예는 그 5배인 40만명정도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시민들은 생산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전쟁과 사상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부정했듯이
지금의 서방세계는 그러한 사상의 껍데기를 쓰면서 그 핵심은 부정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알기비아데스에서

소 : 그러면 도대체 사람은 무엇인가?

알 : 저로서는 답변을 못하겠는데요.

소 : 그래도 신체를 사용하는 쪽이라는 점만큼은 자네가 말할 수 있네.

알 : 예.

소 : 그러니까 말이야 혼 말고 다른 무엇이 그것을 사용하겠나?

알 : 다른 것이 아니라 혼이 사용하죠.

소 : 혼이 다스리면서겠지?

알 : 예.

 : p108 

 
라고 했지만 우리가 부러워하던 그 철학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철학이었으며 민주주의였을까요?
 
그들만의 리그인 민주주의를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그 대체성이 없는 반쪽짜리 사상만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할까요?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사상적으로 우월하고 많이 배우고 돈이 많더라도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아무리 배가 불러도 내 배를 채우기에만 급급하고 그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과연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가 말한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느 곳에 근거에 두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그 가난한사람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다음에 다른 책에서 설명하겠는데
그 책에서는 왜 '가난은 나라님도 못 도와준다' 라는 말이 생겼는지에 대한 시스템적인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이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겼습니다.
아무래도 학자이며서 실천가인 저자가 가지는 한계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같아 부담스러웠습니다.
사실상 우리 개개인이 직접적으로 할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게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혜택이 그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봉지커피의 하나는 그들의 피땀으로 생산되어 우리가 부담없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말고 끊임없이 우리가 소비하는 그분들의 생산물을 기억하고 '공정무역상품' 같은 것들을 이용하면서 우리의 힘을 뭉쳐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에서 우리의 대부분은 승리자가 될수가 없습니다.
승리자는 오로지 상위 0.01%에게 돌아갈 뿐입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우리나라도 그러한 계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언제까지 우리는 경쟁이라는 바퀴를 우리들 스스로 돌리면서 그 바퀴에 벗어나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부르면서 힘들게 그 바퀴를 돌리고 있어야 하나요?
언젠가 낙오가 될지도 모르는 운명을 애써 외면한채..
 
저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체 의식이라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불편하다면 시장에서 지역사회를 위해 사주는 것.
대형마트보다는 알뜰하게 살수 있는 동네편의점에서 물건을 사주는 것.
그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작은 한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좀더 크게 근처 아시아나
더 멀게는 아프리카에도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 지구는 혼자 살기에는 넓지만 같이 살기에는 비좁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는 만약에 창조주가 있었다면 반드시 같이 화목하게 사시는 것을 원했을것이며
없더라도 우리는 같은 인간이라는 종족끼라도 어느 정도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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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반성하기

그냥 생각만 하는 것과 기록하는 것 큰 차이가 있다. 기록한다는 건 자기 이야기를 객관화하는 일이다. 쓰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차분히 정리해야 하므로 저절로 제3자의 시선이 되고, 쓰고 나서 읽어보면서 다시 한번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기 문제를 돌아볼 수 있다. 이는 과거를 돌아보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김영아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 - 김영아의 독서치유 에세이' 중에서 (삼인)
요즘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수 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가정이란 작은 존재도 한 사회의 일부분이니깐 내가 가족을 떠나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사회적인 일부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것에서 문제점이 출발하고 문제점이 해결된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여러가지의 상황과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많들어내는 복합적인 부딪침은 어떠한 교과서나 어떠한 치료자가 있더라도 자신이 변할려는 의지가 우선 있지 않으면 시도조차 힘들며 진척 또한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일기라든지 여러가지 형태로 자신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말로써 해결하는 것은 어쩌면 경솔한 행동으로 또 다른 오해를 낳을수도 있고 녹음하지 않는 이상 다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그렇게 말했는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이렇게 글쓰기에 집착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을 할때 실수할까봐 속으로 끙끙 앓기보다는 이렇게 독서를 하거나 다른 블로그에서 글을 적음으로 해서 내 생각을 표현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간접적이나마 말을 하고 이따금 지난 포스팅을 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생각을 하여 썼을까? 하며 그때 당시를 생각하며 다시금 나를 반성합니다.
 
이상하게 살아가면서 지식보다는 지혜를 갈구하지만 늘 지혜는 내 주위를 맴돌뿐 나에게 직접적으로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단지 이렇게 글로써 그 힌트를 줄 뿐입니다.
제일 좋은 치료제는 자신이 우선 나서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제가 그러한 오해에서 한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좀더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때문에 오해를 갈등으로 키웠지 않나 반성해봅니다.
아픈 영혼과 아픈 영혼이 서로의 아픔을 알지만 서로가 외면하여 생기는 갈등이 더 없었으면 생각해보며
이 책에서 많은 감정의 멍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 자신의 멍때문에 다른 사람의 멍을 지게 한것도 부끄럽게 느꼈습니다.
 
이제 좀더 늦지 않게 나의 잘못은 내가 인정을 하고
좀더 인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니면 좀더 가족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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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두개의 자아를 인정하라

상처 입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현실의 이성적 자아 저 안쪽에 '상처 입은 그 순간'의 옛 자아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옛 자아는 지금 나와는 별개의 인격체다. 이해하는 것 지금의 나일 뿐이다. 지금의 내가 자유로워지려면 옛 자아를 달래 주어야 한다.
지금 나는 옛 자아의 어머니인 것이다.
김영아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 - 김영아의 독서치유 에세이' 중에서 (삼인)
저 책의 주인공처럼 사실 저도 어릴적에 장사를 했던 집안이라 어릴때 기억으로 그렇게 유쾌하거나 따뜻한던 적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성격을 보더라도 그래도 어릴때 부모님과 더 같이 지냈던 동생은 성격이 온화하고 더 밝으니깐요...
 
삶은 자주 우리에게 많은 선택을 하게 합니다.
내가 성공하여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부모님과 대화를 자주하기보다는 좀더 성공하기 위해 뛰어다니거나 공부를 하죠
이건 나만을 위해 그런것이 아니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위의 주인공의 부모님도 그렇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린 주인공과 더 어린 동생을 집에 두고서 방문을 잠겨놓고 일을 나가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다 이게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그렇다는  당위성을 부여하셨겠죠...
 
이러한 주인공과 같이 피해의 당사자가 느끼는 마음에
 이해심과 섭섭한 마음이 항상 같이 공존하고 있지만
언제나 이 둘은 공존을 하면서도 친해질수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셋방 더부살이와 같이
화목하게 지내기 보다는 갈등을 유발하는 관계일수 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사람과의 관계가 더욱더 진척이 될수록
처음에 작아 무시해도 될것만같았던 이 작은 섭섭함의 자아는
수면아래에 있었던것뿐, 보이지 않았을뿐,
그 동안 점점 커져왔었고
그 것이 지금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이해심보다는
과거에서 쌓이고 쌓였던, 계속 보이지 않게 커져온 섭섭함이
은연중에 그 균형을 잃고 폭력이나 일탈과 같은 비도덕적이고
자기도 용납을 하지 못하는 비양심적인 행동을 유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지 그 당시에 그럴수 밖에는 없었지만
그때문에 상처받은거에 미안하다고.
그 당시에는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하고
매몰차게 그렇게 했지만 그땐 너무 미안했었다고
 
진심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인 대면하지 못하고 무심코 그냥 넘기는 그 것들이
나중에 갈등이 오해를 낳고 그것이 서로에게 원수같이 되는 것은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친한 사이들에게는  너무 어리석인 일인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너무 현실세계에는 쉽게, 그냥 아주 쉽게
당연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너무도 많아
서로간에 감정이 쌓였던것이 마침내 폭발하고 앙금으로 남아
서로가 대립하고 법정으로까지 가며
죄없는 제3자에게까지도 이유없는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심없는 진심어린 대화
그것이 가족이든 직원과 사장이든
이러한 믿음과 신뢰가 깃든 대화에서
가정의 화목과, 직장의 성공이 시작하는것 같아
이렇게 글을 한번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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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에서 건축을 배웠다. ★★★★


나는 문학에서 건축을 배웠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억중 (동녘,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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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이라는 기계가 있다.
그 기계의 특성이 시간을 뛰어 넘나들어 천년전의 과거나 천년 후의 미래도 갈수가 있다는 상상속의 기계.
그 기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내가 잘못했던 실수했던 그 옛날로 되돌아가서 다시 바로잡고 싶고
또 한 1주일만 앞으로 갔다가 로또번호 알아내서 다시 이 시간으로 돌아오고 싶기도 하다.
또한 내 평생의 배필자를 미래로 가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서 사람찾는 시간을 줄이고 싶기도 하다.
 
인간은 원래는 각자의 힘으로 살아왔다.
손수 씨를 뿌려 곡식을 걷어서 그것으로 자급자족하여 내 가족을 먹여 살려왔고
사냥도 직접하여 잡아먹고 살아왔다.
그러던것이 1만년의 시간속에서 분업의 형태로 살아왔지만 그래도 자기가 노력한 만큼만 먹고 살아왔다.
물론 소수의 권력층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러던 어느 순간 인간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보다 더 얻게 되었다.
금융이 생기고 부터이다.
그때 부터 인간은 시간의 뛰어 넘기시작했다.
공간은 그때부터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공간은 공간일뿐....
 
과거의 몇세대가 이루어야 할 부를 한순간에 축적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시간을 정복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 그러한 시도로 타임머신을 꿈꾸기 시작했고 만들기에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와중에 놓친게 있다.
시간의 정복에 너무 눈을 돌린 나머지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쳐 버렸다.
 
그것은 공간...
우리가 함께 누리고 살아가는 공간이다.
빛과 같이 흘러가는 유유한 흐름에 시선을 빼앗긴채
우리는 우리가족과 지내는 이 공간을
어릴적에 같이 지냈던 친구의 추억이 있는 공간을
내 사랑이 숨쉬었던 공간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공간은 그대로 있었지만 우리가 그들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공간은 단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공간은 시간은 내포하는 타임머신과 같은 존재이다.
과거의 추억을 기억하게 하며 현재에 내가 들어설수 있게끔하는 포용력을 가지며
미래에 그 공간을 기약하며 꾸미고 노력하게 할 공간은
그 모든 것을 내포하는 타임머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한 현실속에 존재하는 극히 현실적인 타임머신을 부정하고
우리는 상상의 타임머신에 눈을 빼앗겨 버렸다.
 
 
얼마간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방은 깊고 깊은 속내를 보여준다. 이승에서 저승까지. 삶과 죽음의 인연이 거듭되는 곳, 방은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추억의 사원이었음을....
 
..
우리는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공간을 잊어버렸다.
같이 공유하면서 공유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전의 삶의 탄생과 생활 그리고 죽음까지 공유가 되어 추억이 되고 희망이 되며 미래가 되었던
그 생활의 공간을 잊어버리고
단지 우리는 단지 비어만있는 허무함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밖에서는 새벽비가 내리고 있고
나는 작은 방에서 빗소리가 가득찬 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공간은 몇년전부터 이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단지 책을 채우기위한 방도 아니었고 공부만 하기 위한 방도 잠을 자기 위한 방도 아니었을련지도 모른다.
한 겨울의 새벽에 빗소리 가득차기를
내가 새벽에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이 글을 쓰기를 이 집이 지어지고 몇년동안
방이라는 공간이 생긴후부터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 나는 이러한 기다림을 외면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 순간에는 그 나름의 법칙으로 그 이끌림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작은 방에서
불편한 의자에 까치발을 하듯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공간은 시간뿐만아니라 소리와 냄새와 느낌과 추억이 같이 공존하고 있는
가능태의 공간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이 가능태의 공간을 무시한채 단지 그 일부분인 시간에만 눈을 빼앗긴채 우리는 너무 급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고 나부터 반성을 한다.
 
그리고 단지 눕고 일어나는 공간이 아닌 무언가 내 삶을 지탱하는 그곳이 되어 버린 내방에서 오늘도 이렇게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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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한다.

효과적이고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메타사고, 즉 '생각하고 있음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친다.
메튜 프레더릭 지음, 장택수 엮음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중에서 (동녘)
메타인지, 또는 “사고에 관한 사고”은 사고방식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정신적 과정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반성하는 사고, 창의적인 사고라 하기도 하죠.
메타인지의 구성요소 중 계획과 관련된 요소는 “목적 달성에 사용되는 특정 역량, 전술, 과정을 알아내고 이를 촉진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마르자노, 1998, p. 60).
 
이 단계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와 그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인지에 대해 마음 속으로 대화를 합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보다는 좀더 심층적이거나 일반적인 사고외의 것들을 요구하는 일에서 메타사고가 필요합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와 같이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논증한것 처럼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내가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멈추는 순간
나의 지식의 생명은 멈춘다고 생각하고
저는 오늘도 내일도 어떤 일을 하던지 좀 더 개발하지 않고 더 노력하지 않는 (창조적이지 않는)  것에 반성합니다.
 
'일취월장(日就月將)' 얼마나 좋은 말인가요?
내 현 자신을 반성하고 내일은 더욱 더 멋있는 나를 기대하는 것!
 
이럴때 인생은 아름다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행복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저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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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건축은 같은 공간을 소유한다.

P15
 
문학과 건축은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동무가 되어주고 깊이를 더해가며 교제할만한 맞상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겐 건축과 함께할 만한 문학이 있어 괴롭고, 슬프고, 고맙고, 행복하기만 하다.
 
P31
 
아름다운 집이란 형태와 공간이 서로 어울러져 잘 다듬어진 맛깔스런 언어와 같다. 이러한 집에서 우리는 감동적인 공간의 은총을 느끼며 집이 주는 기쁨 속에 살아갈 수가 있다. 집이 있어 소중하고 고마운 것이다.
 
김억중 글 그림 '나는 문학에서 건축을 배웠다 - 삶을 짓는 건축가 김억중' 중에서 (동녘)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건축으로 형성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내가 직접 짓지는 않지만 나는 그 집을 선택하여 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집은 나에게 쉼터가 되고 나에게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지지자가 되어 줍니다.
 
그런 집에 대해 우리는 너무 소홀히 했습니다.
 
문학에서도 방에 대한 가구들이나 환경에 모사를 많이 하더라도
집에 대한 건축에 대한 모사는 잘 없습니다.
 
집은 기가 뭉치고 움지이는 환경의 결정체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인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무 삭막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집은 사물로서 존재하지만 가족들이 같이 공유하는 공간으로써는 하나의 유기물체로 봐야 한다고
요즘 생각이 듭니다.
 
집을 살아있는 존재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 속에 사는 우리는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도
가벼운 존재로 있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간다면 집은 공간을 내포하며
그 공간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포용합니다.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생활하는 곳에 간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사람과 생활 그리고 집
 
한번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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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서핑 핵심어 1 : 가능태


우선 그 기원을 저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보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란?
그리스어로  `보이는 것’ `알려져 있는 것’으로 형상이란 뜻이나,
플라톤은 인간 감성을 초월한 진실적인 존재에 대해 근래에 와서는 특히 이성(理性)의 영원불변하는 최선의 의식내용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정의, 사람 등과 같은 개념들을 정의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적인 성질을 뜻하며, 단순한 관념이나 정신적 실재물이 아니다. 이데아는 실재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이다. 즉  사물의 본체는 이 세상 밖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이데아) 바로 神의 세계라고 보았던 것이다
영문 그 자체로도 생각이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에서 좀더 나아간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4대원인이다
1. 질료인 2.형상인 3.시동인 4.목적인
 
1.질료인은 (質料因): 사물이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소재(素材) 로 하며 가능태(디나미스 dynamis)라고 도 한다. 이 가능태가 이데아적인 원인으로써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기본적인 형태이다. 즉 이 상태가 형상을 얻거나 현실에서 적용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출발점이라고 할수가 있는 것이다.
 
2. 형상인 (形相因): 사물이 <그것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3. 시동인 (始動因): <그것에 의해서>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4. 목적인 (目的因): 사물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목표로> 이루어지는 목적
 
 
이 4대원인중 질료인인 가능태가 원인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형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 2 ,3 , 4 번의 결과로 거의 같이 나타나게 된다.
 
이에 더 나아가 스콜라 철학에서의 아퀴나스의 이론에서 이 가능태는 더욱더 발전하여
 
인간의 지성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과정에 놓여있는 탓에,
 한 번에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
그래서 추상 활동을 통해서 대상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다음에 속성과 우유성, 존재 방식, 상황 등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서 지성이 요소간의 결합-분리와 긍정-부정적 판단을 하고
 다른 판단으로 추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로 하여 인식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즉 저는 책을 읽으면서 여기서 말하는 가능태라는 것은 이미 이세계에서 나에게 주어진 가능성(역할)이 있으며 그 가능성을 나의 관념적인 활동에 의해 현실세계로 실행하게 할수 있는 근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이 가능태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원형인 가능태를 안다는 것은
모든 사건과 사물은 하나의 원형에서 현실로 실현될 때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는데, 
그 다양한 가능성은 이론상 무한하기 때문에
가령 어떤 노래의 작사 작곡을 제대로 알수 있는 악보를 가진다면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성향에 따라 변곡을 할수도 다르게 부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과 같은것으로
가능태를 안다는 것은 이만큼 기본기를 탄탄히 한다는 것과 같은 말로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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