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 김득신

stage7 - Action/reading 2008. 4. 16. 23:24
백곡 김득신(1604~1684).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이며 문학가인 그는 그는 천재가 아닌 평생을 두고 잠시도 쉬지 않은 노력가 이다.
 
김득신이 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는 꿈에 노자(老子)를 만났다.
그래서 아이적의 이름은 노담(老聃)을 꿈에서 보았다고 해서 몽담(夢聃)으로 지어 주었다.
하지만 신통한 태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는 머리가 너무 나빴다.
10살에야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흔히 읽던 《십구사략(十九史略)》의 첫 단락은
겨우 26자에 지나지 않았건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다.

저런 둔재가 있느냐고 곁에서 혀를 차도 아버지는 화내지 않고 되풀이 해 가르쳤다.
아들이 노자의 정령을 타고났으니, 자라서 반드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아들을 두둔해 주었다.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니 그것이 오히려 대견스럽네.
하물며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떠듬떠듬 나아간 공부는 김득신의 나이 20세,
비로소 글 한 편을 지어 올리기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그 글을 받아 보고 크게 감격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더 노력해라. 공부란 꼭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서 물러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후 그는 더욱 분발해서 남들이 즐겨 읽는 글 수백 편을 뽑아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도 길을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남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옛 글을 외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른 선비들은 그가 식당에서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저 친구 또 고문을 외우고 있구먼!’했을 정도였다. 밤에는 늘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누가 물으면 “잠에서 깨어 가만히 손으로 문지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네”라고 대답했다.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자못 엽기적인 노력가다. . 역대 시화(詩話)속에는 믿기지 않는 그의 둔재(鈍才)와 무식한 노력이 전설처럼 돌아다닌다. 한 사람의 인간이 성실과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한계를 그는 보여준 사람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음의 〈독수기(讀數記)〉 한편만 읽어봐도 알 수가 있다.

〈백이전(伯夷傳)〉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老子傳)〉,〈분왕(分王)〉,〈벽력금(霹靂琴)〉,〈주책(周策)〉,〈능허대기(凌虛臺記)〉,〈의금장(衣錦章)〉,〈보망장(補亡章)〉은 2만번을 읽었다. 〈제책(齊策)〉,〈귀신장(鬼神章)〉,〈목가산기(木假山記)〉,〈제구양문(祭歐陽文)〉,〈중용서(中庸序)〉는 1만 8천 번, 〈송설존의서(送薛存義序)〉,〈송수재서(送秀才序)〉,〈백리해장(百里奚章)〉은 1만 5천 번, 〈획린해(獲麟解)〉,〈사설(師說)〉,〈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송궁문(送窮文)〉,〈연희정기(燕喜亭記)〉,〈지등주북기상양양우상공서(至鄧州北寄上襄陽于相公書)〉,〈응과목시여인서(應科目時與人書)〉,〈송구책서(送區冊序)〉,〈마설(馬說)〉,〈후자왕승복전(朽者王承福傳)〉,〈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후십구일부상서(後十九日復上書)〉,〈상병부이시랑서(上兵部李侍郞書)〉,〈송료도사서(送廖道士序)〉,〈휘변(諱辨)〉,〈장군묘갈명(張君墓碣銘〉은 1만 3천 번을 읽었다. 〈용설(龍說)〉은 2만 번 읽었고, 〈제악어문(祭鱷魚文〉은 1만 4천 번을 읽었다. 모두 36편이다.

백이전〉,〈노자전〉,〈분왕〉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많아서였고,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읽은 까닭은 정밀하기 때문이었다. 〈제책〉,〈주책〉을 읽은 것은 기굴(奇崛)해서고, 〈능허대기〉,〈제구양문〉을 읽은 것은 담긴 뜻이 깊어서였다. 〈귀신장〉,〈의금장〉,〈중용서〉 및 〈보망장〉을 읽은 것은 이치가 분명하기 때문이고, 〈목가산기〉를 읽은 것은 웅혼해서였다. 〈백리해장〉을 읽은 것은 말은 간략한데 뜻이 깊어서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은 것은 스케일이 크면서도 농욱하기 때문이다. 무릇 이들 여러 편의 각기 다른 문체 읽기를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와 《사기》, 《대학》과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는 싣지 않았다. 만약 뒤의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 내가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괴산 취묵당(醉黙堂)에서 쓴다.
만 번 이하로 읽은 것은 아예 꼽지도 않고, 만 번 이상 읽은 36편 문장의 읽은 횟수를 적은 글이다. 도대체 김득신의 미련이 아니고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정작 내게 놀라운 사실은 그가 허구 헌 날 같은 글을 되풀이 해 읽으면서 읽은 횟수까지 빠짐없이 적어두었다는 점이다.  
 
 
감산득에게는 많은 일화들이 있다.
 
일화 1
김득신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밤 신랑은 신부를 제쳐두고 방을 뒤지며 책을 찾았다. 경대 밑에서 백곡이 발견한 것은 책력(冊曆). 밤새도록 읽고 또 읽은 백곡은 날이 새자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냐”고 말했다 한다.
 
일화2
말을 타고 하인과 함께 어느 집을 지나다가 글읽는 소리가 들려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나는구나."
하인이 올려보며 "부학자 재적극박 어쩌고저쩌고는
나으리가 평생 맨날 읽으신 것이니 쇤네도 앍겠습니다요. 나으리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1억1만3천번 읽었던 <백이전>인 것을 알았다.
하인도 지겹게 들어 줄줄 외우던 백이전이다.
 
일화3
그가 한식날 하인과 길을 가다가 5언시 한구절을 얻었다.
그 구절은 '마상봉한식'(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이었다.
그가 한참동안이나 대꾸를 찾지 못해 끙끙대자 하인이 이유를 물으니 대꾸를 못찾아 그런다 했더니
하인녀석이 대뜸 '도중속모춘'을 외치는 것.
즉 '말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도중에 늦은 봄을 맞이하였네!!"로 그럴싸한 구절이 되었다.
깜짝 놀란 김득신이 말에서 내리더니, "네 재주가 나보다 나으니, 이제부터 내가 네 말구종을 들겠다."하니 하인 녀석이 씩 웃으며 "나으리가 날마다 외우시던 당시가 아닙니까?" 하였다.
김득신 왈, "아 참 그렇지!"
 
일화4
한번은 그가 친구들과 압구정에 모여 시를 짓고 논 일이 있었다.
그는 하루 온종일 생각하다가 날이 저물 무렵,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겨우 두 구절을 얻었네만 아주 훌륭하다네"하니 친구들이 "뭔가?"하니
김득신 왈 " '삼산은 푸른 하늘 밖에 반쯤 떨어지고, 이수는 백로주에서 둘로 나뉘었네'일세.
멋지지 않은가?" 하니 친구들이 웃으며 "이게 그대의 시인가? 이것은 이백의 시 <봉황대>일세." 하니
김득신은 풀이 죽어 탄식하며, "천년 전 적선이 나보다 먼저 얻었으니 석양에 붓 던지고 서루를 내려오네." 라고 하니,
듣던 친구들이 웃다가 쓰러졌다. 하도 많이 읽어 자신이 지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 정도이고 보면 독서광을 넘어 '책과 한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화5
김득신이 그의 친구 집에 머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출타 중이었다. 그런데 친구 홍석기의 종이 솥을 들고 들어오길래 김득신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 종이 대답하기를 "빚 받을 집에서 뽑아 왔습니다." 김득신은 일말의 주저함이 없이 책을 거두어 돌어가려 하자 마침 홍석기가 들어오다 그 광경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두번 세번 묻자 그제서야 그 일을 말하였다. 홍석기가 "이것은 내가 모르는 일이다. 내 집에 과부가 된 누이가 있는데 혼자 한 일이다. 실로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간곡히 사과하여 그제서야 그만 두었다.

일화6
득신은 친구 구장원과 서로 사흘 걸리는 거리에 살았는데 몇년전에 년월일을 정하여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마침 비바람이 크게 불고 날이 늦은지라 구장원은 김득신이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과연 그가 이르렀다. 그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둔재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의 열정적인 성품, 빚 대신 가난한 집 솥을 뽑아 오는 친구의 각박함을 보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의 집을 박차고 나왔던 따뜻한 성품, 그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 몇 년 친구와의 약속은 잊지 않고 지켰던 독실한 성품이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후손들도 또한 본을 받으려 하였다. 이는 몇 백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아둔한 머리를 탓하며 노력을 게을리하였던 것은 아닌지 반성케 한다. 그가 삶 전체로써 던져준 가르침 앞에서 저절로 숙연해질 따름이다.

cf>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정민, <미쳐야 미친다>, 푸른역사. 를 그대로 발췌하였으며, 글의 재미가 반감될까 하여 거의 그대로 발췌하였다. 그러다 보니 분량 또한 많아졌던 점은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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