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강남의 C씨는 1년 전, 고등학생 아들에게 적금통장을 만들어줬다. 은행에 같이 오지만 절대 같이 상담하는 법이 없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형성된다. 계획에서 실행까지 본인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경제활동 속에서 돈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다는 취지다.
용돈도 한달에 20만원만 아껴서 준다. "자식에게 많은 돈을 줘 기를 살려주고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길게 볼 때 많은 용돈은 해악이 될 뿐"이라는 생각에서다.
목동에 사는 대기업 임원은 아들이 어려서부터 일정한 규모 이상인 용돈은 무조건 적금통장에 넣도록 의무화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적금을 해지하고 얼마 전 적립석펀드로 전환했다. 그는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교훈을 아들이 몸소 깨우친 것 같다"며 "펀드로 전환하고 보니 국가 경제, 주식시장 등에 대해 부쩍 관심이 늘었다"고 좋아했다.
부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녀들에게 경제, 교육을 시키고 있다. 2세들이 자신의 부를 더 늘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잃지 않고 오래오래 보존하려는 욕구가 적지 않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지닌 대기업 오너들의 경우 대부분 아들을 해외의 명문 대학에 보낸다. 전공은 대부분 경영학이나 경제학이다. 경영을 승계한 최태원 SK 회장, 경영 수업이 한창인 삼성전자 이재용 상무, 현대모비스 정의선 사장 등이 다 그렇다.
학업이 끝나면 회사에 입사해 초고속 승진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는다. 이렇듯 '큰 부자'들의 경제교육은 철저한 시스템 속에서 이뤄진다.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돈의 생리를 잘 아는 경제적 인간으로 성장한다. 부자들의 사회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도 익힌다.
재산 규모가 100억원 안팎인 부자들의 자녀 경제교육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절약-내핍'을 기본 컨셉으로 삼는 '짠돌이' 스타일이며 다른 하나는 아예 경제 교육에 무관심한 '졸부'의 형태다.
◇큰 부자들의 체계적인 경제 교육= 명품 브랜드를 2개 운영하고 있는 A씨(재산 5000억원 이상). 50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번번한 사옥 하나가 없던 차에 마침 사옥을 하나 구입하기로 하고 아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아들은 역세권에 위치한 100억 원짜리 건물이 60억~70억 원선에 매물로 나와, 이를 낙점하고 아버지에게 최종 사인을 받으러 갔다.
A 씨는 옥상에서 지하까지 전 층을 오르내리며 꼼꼼히 건물을 뜯어본 뒤 하나만 물었다. "배수관 재질이 뭐냐?" 수분에 오래 견디는 청동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즉시 허락했다. A씨의 메시지는 사업, 투자, 재테크의 판단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하라는 것이었다. A씨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깨친 노하우를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전수해주는 '큰 부자'의 전형이었다.
모 그룹 회장의 부인인 B씨. 그녀는 남편의 재산관리와 자녀 교육을 전담하고 있다. 남편은 홀인원을 해도 '턱'을 안낼 정도로 검소한 편. 아들만 셋을 둔 그녀는 절대로 아버지가 하는 일과 유사한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10년을 내다보고 고민할 사업을 찾아서 해보라"는 게 유일한 주문이다. 그리곤 5000만원씩을 빌려줬다.
"끝까지 아이들의 사업 성공여부를 지켜볼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60년대 100대 기업 중 살아남아 있는 기업이 고작 7개인 게 현실이다"는 게 B씨의 판단이다. B씨는 다 큰 자식들에게 집 한 채 해주지 않으며 자생력을 키우는데 중점을 뒀다.
멀리보는 경제관점-근검절약 심어주기서울 양천구의 중소기업 사장 D씨(자수성가했으며 자산은 30억 원 정도). 지인들과의 저녁에도 5000원짜리 백반을 권하는 D씨는 자식들에게 절대 돈을 풍족하게 안주고 내핍생활을 강요한다.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고 심지어 반감을 느낄 때도 있다한다. 그러나 "미워하며 닮아간다는 말처럼 아들 역시 자신처럼 검소한 부자가 될 것"이라는 게 D씨의 소신이다.
경기도 부천에서 주유소를 여럿 거느린 E씨. E씨는 평균 한달에 한번 꼴로 자신의 주유소를 시찰한다. 어김없이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두 아들과 함께다. 시찰 중 E씨는 아들에게 젊은 시절 고생을 틈틈이 들려준다. 막노동에 하수구 뚫기까지 바닥 생활의 시린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과거를 하나둘 알아가며 돈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있다. 학과 공부도 발군이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강남에서 은행지점장을 했던 F씨는 "재벌이나 일부 선진의식을 가진 부자들만 경제 교육을 중시하지, 적지 않은 부자들은 해외유학, 군 면제에만 혈안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 여전히 많은 부자들이 돈의 양만 중시하는 졸부를 벗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특별취재팀=홍찬선 증권부 부장대우(팀장), 김재영 재테크부 기자, 유일한 산업부 기자, 최명용 금융부 기자, 송복규 부동산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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