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을 굶주리게 하는가?

제네바의 은행가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 (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p163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중에서 (갈라파고스)
지금 세계에는 63억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을 100이 사는
마을로 축소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100명 중
52명은 여자이고
48명이 남자입니다.

30명은 아이들이고
70명이 어른들입니다
어른들 가운데 7명은 노인입니다

90명은 이성애자이고
10명이 동성애자입니다

70명은 유색인종이고
30명은 백인입니다.

61명은 아시아 사람이고
13명은 아프리카 사람
13명은 남북 아메리카 사람
12명은 유럽 사람
나머지 1명은 남태평양 지역 사람입니다.

33명이 기독교
19명이 이슬람교
13명이 힌두교
6명은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5명은 나무나 바위 같은 모든 자연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4명은 또 다른 종교들을 믿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17명은 중국어로 말하고
9명은 영어를  8명은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6명은 스페인어를, 6명은 러시아어를,
4명은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들을 모두 합해도 겨우 마을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반은 벵골어,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합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일들을 안다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 죽기 직전이고
그러나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중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입니다.
74명이 39%를,
20명이 겨우 2%만 나눠가졌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은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았고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에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소유한자는
100명 중 7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마을사람들 중 1명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도 읽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괴롭힘이나 체포와 고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48명 보다 축복받았습니다.

당신이 만일
공습이나 폭격, 지뢰로 인해 다치거나 죽고
무장단체의 강간이나 납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지 않은 20명 보다 축복받았습니다.

1년 동안 마을에서는 1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2명의 아기가 새로이 태어나므로
마을 사람은 내년에 101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하세요
당신은 결코 상처받아 본적 없는 것처럼 사랑하세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춤을 추세요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노래하세요
땅 위의 천국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세요

먼저 당신이
사랑하세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당신과 다른 모든 이들을

이 편지를 읽는다면 그 순간
당신의 행복은 두 배 세 배로 커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당신을 생각해서
이 메일을 보내준 누군가가 있을 뿐 아니라
글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지금 당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돌고 도는 것은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다고

진정으로 나, 그리고 우리가
이 마을을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다면
정말로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갈라 놓는 비열한 힘으로부터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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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에 이 글을 보면서 저 마을의 상위 20%에 드는 저를 보면서 저는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사람들은 되살려 기억을 했지만 이내 그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이책을 보면서 다시금 나머지의 80%의 사람들은 다시금 기억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책은 저자의 감정적인 부분이 많아서 이 책 자체에서도 모순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책에서 우리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은 100명의 마을에서 나오는 80%의 가난한 사람보다는 더 힘든 가축보다 생존을 보장받기 힘든 20%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책에서도 빈곤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구조적인 기아에 대해서 논하고 있고 그 문제의 중심에는 다국적기업과 그 해당 국가의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주로 아프리카를 주로 다루고 있죠.
 
다른 이야기들은 이 얇은 책을 조금만 읽어보시면 알수 있으니 생략하고,
 
무엇이 이런 구조적인 기아에
수억명의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그 사람들을 도와줄 여력이 있는 우리가
굶주린 그들을 수수방관하면서, 그렇게 맥없이 그사람들이 죽는 현실을 외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우리가 살아가게끔 할수 있을까요?
 
 
그 것의 답은  이책의 후미에 나오는 부분으로 그 중심에는 사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승리자의 목소리라고 하는 신자유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들은 그 시장의 논리에서의 패배자이며 인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시장이라는 정글에서 아무리 먹고 먹히는 관계일지라고
배부른 사자는 다수의 영양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희생된 다른 영양들이 오히려 안심하고 살아갈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러한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 100명의 마을이라는 동네를 1명채 되지도 않는 반의 반에 또 다시 반에 그 반에 반의 사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탐욕의 끝은 어디까지인가요?
과연 저들의 재산의 수위가 어디까지 올라가는 것을 우리는 부러움의 대상으로만 인식을 해야 하는 걸까요?
 
효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일까요?
 
쓰나미로 질병에 고통받고 있는 아시아의 나라에 쓰레기 의약품을 내다버리듯 구호하는 일본과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
그들은 과연 선진국이라고 본받을만한 나라인가요?
그들은 무작정 여과없이 그대로 따라할 만한 나라인가요?
 
그들의 사상은 승리자의 사상입니다.
플라톤의 사상도 그렇고 다른 여타 서양 사상가들은 승리자의 사상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가 노동자의 사상인 사회주의가 나오면서 서양의 역사는 반성하게 됩니다.
 
서양의 민주주의의 모태라는 그리스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었던가요?
투표권자인 그리스 남성이 1명이라면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는 여자와 노예가 얼마나 있었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모르셨겠죠.
아테네의 그때 시민의 인구는 8만명선.
노예는 그 5배인 40만명정도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시민들은 생산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전쟁과 사상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부정했듯이
지금의 서방세계는 그러한 사상의 껍데기를 쓰면서 그 핵심은 부정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알기비아데스에서

소 : 그러면 도대체 사람은 무엇인가?

알 : 저로서는 답변을 못하겠는데요.

소 : 그래도 신체를 사용하는 쪽이라는 점만큼은 자네가 말할 수 있네.

알 : 예.

소 : 그러니까 말이야 혼 말고 다른 무엇이 그것을 사용하겠나?

알 : 다른 것이 아니라 혼이 사용하죠.

소 : 혼이 다스리면서겠지?

알 : 예.

 : p108 

 
라고 했지만 우리가 부러워하던 그 철학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철학이었으며 민주주의였을까요?
 
그들만의 리그인 민주주의를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그 대체성이 없는 반쪽짜리 사상만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할까요?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사상적으로 우월하고 많이 배우고 돈이 많더라도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아무리 배가 불러도 내 배를 채우기에만 급급하고 그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과연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가 말한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느 곳에 근거에 두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그 가난한사람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다음에 다른 책에서 설명하겠는데
그 책에서는 왜 '가난은 나라님도 못 도와준다' 라는 말이 생겼는지에 대한 시스템적인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이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겼습니다.
아무래도 학자이며서 실천가인 저자가 가지는 한계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같아 부담스러웠습니다.
사실상 우리 개개인이 직접적으로 할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게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혜택이 그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봉지커피의 하나는 그들의 피땀으로 생산되어 우리가 부담없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말고 끊임없이 우리가 소비하는 그분들의 생산물을 기억하고 '공정무역상품' 같은 것들을 이용하면서 우리의 힘을 뭉쳐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에서 우리의 대부분은 승리자가 될수가 없습니다.
승리자는 오로지 상위 0.01%에게 돌아갈 뿐입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우리나라도 그러한 계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언제까지 우리는 경쟁이라는 바퀴를 우리들 스스로 돌리면서 그 바퀴에 벗어나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부르면서 힘들게 그 바퀴를 돌리고 있어야 하나요?
언젠가 낙오가 될지도 모르는 운명을 애써 외면한채..
 
저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체 의식이라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불편하다면 시장에서 지역사회를 위해 사주는 것.
대형마트보다는 알뜰하게 살수 있는 동네편의점에서 물건을 사주는 것.
그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작은 한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좀더 크게 근처 아시아나
더 멀게는 아프리카에도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 지구는 혼자 살기에는 넓지만 같이 살기에는 비좁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는 만약에 창조주가 있었다면 반드시 같이 화목하게 사시는 것을 원했을것이며
없더라도 우리는 같은 인간이라는 종족끼라도 어느 정도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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