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편견,빈곤


p75
빈곤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당연시한다.
이러한 설명은 산업사회에서 규정된 빈곤의 개념을 전 세계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킨다.
...
빈곤은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화에 대한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개발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먼저 어떤 특정 방식으로 가난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p84
'발전'과 '세계화'는 식민주의가 완전히 억압하지 못한 예전 식민지들의 자립적인 삶을 계속해서 억압하고 있다. 만일 지금 서구에서 판에 박힌 수법으로 지속 가능성을 조장한다면 이는 토착민들의 자립적인 삶을 더 효과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p88
이렇게 세계시장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벌을 내리는 것은 횡포이다. 하지만 전 세계가 자신들의 규칙을 따라 살도록 결정해 버린 권력자들은 이것을 자유라 부르고 있다.
 
p91
이러한 현상들은 사람들이 탐욕스럽거나 이기적으로 변해서가 아니라 검소와 절제를 무시하는 체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양식은 지속적인 성장과 팽창을 제도화하고 있으며, 무제한적인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경제성장에 이용되고 있다.
 
 
제레미 시브룩 지음, 황성원 옮김 '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 - 세계의 빈곤 World Poverty' 중에서 (이후)
이 책을 읽으면서 빈곤의 개념을 재정립을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배워온 빈곤의 개념을 결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다른것을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우리의 하루 생활은 모든 것들이 내가 직접 생산한 것은 10%도 안되며 실제로 없을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에서 나의 생활에 돈은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므로 하루에 100달러도 적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산으로 가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나는 직접 쌀도 작농할수도 있고 아니면 산에서 나물이나 약초를 캐서 쌀과 교환을 해서 생활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부산물로 돈이 생긴다면 나는 저축을 해서 나중에 아플때 약을 구하거나 옷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매일 발생하지 않으므로 난 하루에 1달러로 살아간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자! 과연 1달러로 살아가는 산에서 무기농으로 산과 자연을 벗삼아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난하다고 하여 무시할수가 있을까요?
100달러를 쓰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도시인을 잘 산다고 할수가 있을까요?
 
부의 기준과 빈곤의 기준을 단지 돈으로만 계산하여 살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너무 생활의 기준을 획인화하여 생각하여 내 자신을 구속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으신가요?
 
우리는 한해가 저물거나 어느 특정한 일이 있을때 가장 행복한 나라와 가장 불행하다는 나라의 순위를 나타내는 나라들을 봤을때 빈국에 속하는 나라가 오히려 가장 행복하다는 나라에 속하고 선진복지국가라고 하는 덴마크나 스웨덴이 오히려 30위에 속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신가요?
그리고 느껴셨다면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개발을 하면 모두가 잘살아야 하는데 용산 사태처럼 저렇게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사람이 생길까요?
 
경제의 기본 원칙은 모두가 서로에게 이익을 되는 행동에서 발생한다는 것인데, 왜 누구는 세상의 부를 모두 짊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를 생활하는 것 조차 목숨을 걸어야 할까요?
 
저는 이 것을 보면서 우리의 경제 교육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즉, 어느 물품이나 재화의 다름은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봄니다. 미술품을 예로 들어서 램브란트가 그린 초기의 습작같은 그림은 누가 봐도 어설프더라도 그 작품 같지도 않은 그림은 몇억씩 합니다. 단지 램브란트가 그렸다는 이유 만으로 그 그림은 작품이 아니더라도 옳다는 전제가 깔립니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영감을 불러 일으키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무명화가의 그림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몇백만원을 받기도 힘듭니다.   사람의 감정도 돈의 검증을 받아야만 한가요?  무엇이 문제 일까요?
 
개발이라는 것을 발전을 시키기 위한 시작단계라고 봅니다. 그러면 발전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내용들을 본다면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일정한 방향이란 어떤 것일까요?
과연 일정한 방향이라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요?
사회적합의라는 일정한 방향에는 다름이 없는 것인가요?
 
우리는 여기에 문제점을 봐야 합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일정한 방향으로 가야 하기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사회발전이란 명분에 다르게 가는 것을 다르다고 하지 않고 틀리다고 하며 그 다름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법으로 강제적으로 쫒아 내거나 보상이라는 명분으로 강제적으로 내 규칙에 들어오게 하는 것!
그 사람이나 그 가족, 아니면 더 크게 후진국이라고 불리우는 그 독특한 문화공동체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빌딩숲으로 쌓여 있는 사회를 선진화된 도시라고 불리우며, 그러한 시스템이 없는 곳을 미개로 부르는 그 선진문명이라고 불리우는 오만한 사회가 과연 부의 진정한 기준이며 인간의 행복의 기준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정의를 나눔에도 저만의 오만이 생겨 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들만의 정의를 과연 남에게 권하고 이러한 경제영역에 포함하지 않으려는 나라들을 정치나 쿠테타나 테러로 길들여 소기의 목적을 채우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긴 원죄를 두려워해 자기 나라에 입국하는 모든 사람들을 감시할려는 요즘의 보안시스템의 강화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두려워하게 된것이 과연 무엇 때문에 생긴것인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 것인지, 그 근본적인 것을 알면서도 범지구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자초하면서도 그렇게 자기만의 부를 축적하고 싶은지 묻고 싶습니다.
 
또한 해마다 가장 부유하다는 나라와 인간발전지수가 높은 나라들과 행복한 나라의 순위를 비교할때 과연 우리는 행복하는 기준을 인간적인 기준이 아닌 지식과 교양과 돈으로만 판단하는 정형화된 기준을 언제까지 유지 할것인지도 묻고 싶습니다.  이러한 정형화된 기준이 높다는 나라에서 왜 갈수록 우울증과 자살이 증가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부유함과 빈곤함은 명확히 부자들만 이롭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조이라고 하는데, 왜 대다수는 이러한 불리한 이데올로기에 편협하도 동조를 하는지, 그 희생양에 자신이 포함되고 있는데 왜 자신은 그 범위에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어제 차에서 부산으로 내려 갈때 DMB로 친환경농법으로 사과를 생산하고 오이와 채소를 기르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아오모리현의 어떤 농부가 사과농사를 짓는데 자신의 아내되는 분이 농약 알레르기가 있어 친환경으로 사과를 지을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사과가 열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 열심히 친환경을 하고자 잡초도 제거하고 퇴비도 주고 여러가지를 시도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 그래서 포기를 하고 죽을려고 산에 올라갔다고 하죠. 그 때 그분은 발견을 한것입니다.  '그래 산에서처럼하자, 자연 그대로 그렇게 작업을 하자' 그렇게 결심하고 내려와 과수원을 원시림의 산처럼 그냥 두었습니다.  퇴비도 안주었다고 하죠.
다시 그러기 몇년 드디어 그 사과나무는 꽃을 맺고 열매가 달렸는데 그 사과의 당도와 맛은 어느 것과 비교가 안되며 완전 천연 식품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자연적으로 자라다 보니 억지로 질소를 넣어 키운 사과보다 조직도가 더 좋아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섞지 않고 그대로 수분만 빠져 마르는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그 밖에 미국의 돼지와 소 닭의 자연상태의 사육을 보면서 ' 아! 우리는 농사짓는 방법마저 획인화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농부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오히려 하지 않은게 성공적이었다고..
저는 여기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다고..
자연의 농사법처럼 퇴비도 안주고 잡초도 제거 하지도 않아도 되는 일을, 우리는 너무 많이 알기에 일부러 힘들여서 하고 있다고,
여기에 더 나아가 우리가 부를 획득하는 것도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너무 많은 것을 비교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성공한 사람의 전기와 평전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성공해야지 하고 수십명이, 아니 수천명이 그렇게 따라하고 아웃라이어나 탤런트코드 처럼 성공하기 위해서는 저렇게 해야지 성공한다는 성공코드를 그렇게 따라하는 것조차 우리는 세계의 불평등과 빈곤을 부축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않았다는 불안감에 쌓이는 우리들,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단지 성공을 위한 패러다임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살기 위한 공존을, 사회주의와 같이 다 같이 잘 살겠다고 하면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 하여 오히려 실패를 자초한 것과 다른,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나의 넘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모자람에 신경을 쓰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언제끔 그러한 세상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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