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정의는
소수자들의 저항을 통해 성립한다
강자의 이익에 대한 저항과
그 저항을 뒷받침하는
대중의 정의감이 결합해야만
정의로운 사회를 기약할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 정치와 도덕은 분리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자주 등장했던 말들이 ‘대의명분’이나 ‘정의로운 전쟁(벨룸 유스툼)’ 같은 말이다. 이런 말에는 실상이야 어떻든 전쟁은 도덕을 통해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근대에 도래한 여러 변화들 중 하나는 도덕과 정치의 분리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과정을 정확히 보여준다. 이런 변화가 가져온 한가지 결과는 전쟁과 도덕의 분리이다. 전쟁은 철저하게 이익 추구와 결부된다.
미국등 강자가 선악 규정
그러한 현대에 이르러 전쟁과 도덕이 다시 결부되기에 이르렀다. 1989년 걸프전 이래 미국이라는 절대 강국이 동조자들을 등에 업고 세계의 ‘경찰국가’로 등장함으로써, ‘도덕적 개입’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걸프전 이후 클린턴 정권 때 ‘암흑시대’를 보낸 네오콘들은 아들 부시의 당선으로 다시 그들의 시나리오를 펼치고 있다.
현대가 미국의 일방적 주도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브레튼우즈 협정(1944)으로 힘을 모았던(이 협정으로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잡는다) 미국에 대항해 유로가 태어나고, 이에 대한 반격으로 석유 전쟁이 벌어지는 등(유럽은 수입 석유의 거의 대부분을 중동에서 산다) 미국과 유럽의 갈등을 비롯해서(유럽의 나라들 중 친미 국가들도 여럿 있지만, 주축인 독일과 프랑스가 미국을 견제하는 한 갈등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역학관계들이 국제 정세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의 모든 힘이 집결되는 곳은 한쪽 끝에는 유럽이, 다른 한쪽 끝에는 동아시아가,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러시아가 포진해 있는 유라시아 대륙이다. 매파들에게는 유라시아 대륙은 미국이 정복해야 할 ‘거대한 체스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도 전쟁은 계속될 것이고, 그 전쟁의 명분은 계속 도덕이 될 것이다. 즉 어떤 ‘악’의 존재가 있고 그 악한 존재를 타파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내세워질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자의 이익’으로 규정한다. ‘강자의 이익’을 트라시마코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각 정치체제의 지배자들 즉 강자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법률을 제정한다. 그리고 이 법률을 피지배자들에게 공표하고, 그것을 위반했을 경우 정의의 이름으로 범법자로서 처벌한다. 따라서 강자의 이익이 정의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이런 논리는 한 국가의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강대국들과 약소국들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오늘날의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트라시마코스의 언표들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미국 중심의 강국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악/선’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전 세계에 공표한 뒤, 자신이 악으로 규정한 국가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공격한다. 따라서 정의란 강국의 이익이다.”
‘악의 제거’ 대의명분 활용
이에 대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분개하면서 강자의 정의는 가짜 정의이며, 정의롭지 못한 강자는 타파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트라시마코스는 이에 덧붙여 좀 더 강력한 논리를 구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강자가 못되기에, ‘도덕’이나 (강자와는 다른 방식의) ‘정의’를 내세워 강자를 비난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화 참여자들은 ‘귀게스의 반지’를 예로 든다. 이 반지를 끼면 투명인간이 되어 제 마음껏 쾌락을 누릴 수 있다. 누구라도 반지가 자기 것이 되어 누릴 쾌락들을 상상해 봤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귀게스의 반지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파기하거나 금지하기를 원할 것이다. 자기가 그 반지를 가질 확률이 크지도 않고, 남이 그것을 가졌을 때 혹시라도 자기가 당할 피해를 생각하면 자기가 가졌을 때 누릴 쾌락보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는 강력한 면이 있다. 예컨대 사람들이 부르주아들을 비난할 때, 그 비난이 진정한 비판이 되려면 보편적인 정의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 만일 자신에게 부르주아가 될 기회가 생긴다면, 부르주아를 비난하던 사람들 상당수가 자신도 부르주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부르주아를 비난한 것은 단지 자신보다 잘 사는(돈 많은 것이 잘 사는 것이라 한다면) 것에 대한 질시 이외의 것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비판이라면 정말 세상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기에 부르주아를 비난해야 하며, 자기 자신은 설사 그렇게 될 기회가 온다 해도 그것을 거부해야 할 것이다. 실험을 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회구성원 공감대 있어야
트라시마코스의 논리를 정치적 현실에서 볼 때, 대부분의 국가들은 미국 같은 강국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당하는 입장이기에 미국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비난이 진정한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이런 논리에 대해 플라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답하지만, 그 중에서 결정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반론이다. “말이 잘 달릴 수 있고, 눈이 잘 볼 수 있고, 단검이 잔가지를 잘 잘라낼 수 있다. 즉 모든 사물은 그것이 가장 잘 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리고 각자의 기능이 가장 잘 발현될 때 그 뛰어남을 갖추게 된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뛰어남도 존재하며, 뛰어난 영혼은 우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살게 해 준다. 정의는 정신의 훌륭한 상태이지만, 부정의는 못된 상태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지만,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잘 살지 못한다. 정의로운 자는 행복하나, 정의롭지 못한 자는 불행하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거짓 잘 사는 것과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사는 것은 구분하고 있다. 이 구분이 성립해야만 플라톤의 논리가 성립한다.
따라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거짓 잘 사는 것과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을 진심으로 구분할 것인가이다. 다른 경우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에서도 대중들의 평균적인 의식이 결정적이다.
만일 위의 구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자가 행복하고 부정의한 자가 불행하다는 것은 몽상적인 이야기가 된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불행하고 부정의한 사람이 행복한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 경험이 많이 쌓이면, 사람들은 세상을 불신하게 되고 조금씩 냉소주의자가 되어간다. 여기에서 문제는 불행과 행복을 플라톤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즉 그런 행복은 거짓 행복이며 사실상 불행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강자가 휘두르는 폭력에 저런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다. 또 그런 강자는 결국 불행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적어도 현대 정치의 맥락에서는 너무 약한 논리이다. 플라톤의 논리는 윤리의 맥락에서는 일정한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정치의 맥락에서는 쉽게 현실화될 수 없다.
정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의 절대 다수가 가지는 정의감이다. 정의감의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가 정의감이 낮은 사회에서는 “뭐, 그럴 수도 있지”가 된다. 이 두 판단을 가르는 경계선이 어떤 수위에 있는가가 그 사회의 정의감이다.
사람이란 혼자 생각만으로 행위를 할 수는 없기에, 높은 정의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함부로 행위를 하기는 힘들며 또 정의감이 낮은 사회에서는 그만큼 쉽게 행위를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런 논리는 남의 ‘눈치’를 전제하기 때문에 크게 자율적인 정의관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 정의감이다.
진정한 정의는 소수자들의 저항을 통해서 성립한다. 강자의 이익에 대한 소수자들의 저항과 그 저항을 뒷받침하는 대중의 정의감이 결합해야만 정의로운 사회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