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끼호테와 삶의 해석

돈끼호떼 2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미겔 데 세르반테스 (창비,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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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우리의 체험이 '해석된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 창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감각에 의하여 정보를 주로 얻는다.
이러한 정보에는 감각적인 시각에 의해서 얻는 부분인 '붉은 꽃이 아름답다' 라든지 후각인 '음~ 좋은 향기'라는 것들의 정보가 합쳐져 '붉은 꽃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향기도 좋아' 라는 종합적인 결과로서 사물의 정보를 인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경험이라는 부분으로 축적이 되면 문자라는 형상에서 우리는 이러한 과거에 경험된 사건이 되살아나면서 '여인이 붉은 장미를 집어 들어 향기를 맡으니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했다' 라는 문장을 만나게 되면 과거의 경험이 되살아나 지금 현장에서 꽃의 향기를 맡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즉 이러한 과거의 경험은 가상현실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요즘 PC나 영화상에서 나오는 가상현실이 생소한 일이 아닌셈이다. 문자라는 것은 수천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각적인 사실에서 좀더 들어가 우리가 겪는 감정인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논하기로 하자
우리는 무엇에서 행복과 불행이라는 감정을 느끼는가?
 
어느 한 강의에서도 김홍선 대표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진정한 행복입니다.” 
라는 명제와 같이 바라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 지는게 행복이라는 것일수도 있다면 불행은 바라지 않는것이 일어나는 것이 불행이라는 말이 되는가?
그러나 '시크릿'이나 다른 여타 책에선 불행도 본인이 그렇게 바랬기때문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명제에서 바라는 것이나 하고 싶은 하는 것은 부지부식간에 일어나기때문에 진정한 행복의 명제는 될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서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니체는 삶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다른 감각과 같이 각자의 다른 삶의 경험이 이러한 해석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겪는 사건이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느끼는가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우리는 왕양명의 일에서 처럼 마음 心 에는 선함과 악함보다는 좋고 나쁨만이 존재하게 되는 良智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즉 어떠한 사건이 선함과 악함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겪는 사람의 심적 상태나 과거의 경험, 가치관에 따라서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것들이 좋고 나쁨으로 이어져, 이것이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말은 고통이란 개인적인( 정신적이고 신체적, 과거경험적)부분과 사회적, 문화적, 시대적 해석에 따라 재해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도 불과 다른 가족의 구성원에게는 불행이라는 재해석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쉽게 예로 들자면 육체적인 레슬링이라는 부분을 싫어 하며 체면을 중시 사람 A과 그러한 육체적인 부분으로 우정을 나누는 사람 B가 만나서 반갑다는 표시로 길가에서 악수를 하는 대신 송강호의 영화처럼 헤드락을 건다면 당하는 입장 A에서는 사회적 체면에서 창피함게 동시에, '이사람이 나를 무시하나?' 라는 친구인 B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은 개인적으로도 흔히 일어나게 되며 크게는 국가적인 부분에서도 많이 일어난다. 그 갈등의 고조의 최대치는 전쟁이라고 불리운다.
 
그러한 재해석은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비이성적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부분도 자신의 의지가 들어간다면 충분히 긍정적인 부분으로 전환이 가능하다는 말도 될수 있다. 이러한 것 때문에 대중들에게 시크릿이라는 사기가 충분히 먹혀 들어 가기도 했다.
 
과거에는 고통이 생각만큼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으면 오히려 현재에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고통스러워 한것도 많았다. 즉 행복이라는 불행이라는 관점과 고통이라는 관점은 이러한 여러가지 변수에 의해 충분히 조절이 가능하다는 말도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말한다면 백신의 예를 들수도 있겠으며 체육으로 따진다면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해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도 이런바 서서히 면역력을 길러 소소한 불행을 큰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예가 될것이라 생각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 끼호테에 다시 되돌아 가기로 합니다.
왜 돈 끼호테는 그렇게 맞아가면서 몸 성한 날이 없으면서도 그러한 방랑기사를 고집하며 말도 안되는 '공주님' 이 어쩌니 '기사도'가 어쩌니 하는 말을 한다는 말인가?
이런바 여타 이야기처럼 돈 끼호테가 미쳤다는 말인가?
 
그러나  2권을 모두 읽어 본바로는 아니다.
돈 끼호테는 철저하게 제 정신이었으면 2권에서 보인 산초에 대한 광기 또한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하며 자기가 바라는 이상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 우리가 보기에 미친것으로 보였을뿐이다.
 
과연 미쳤다면 죽기얼마전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말을 과연 회광반조라는 말로만으로 다 설명을 할수가 있을까?
 
니체는 이런바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실천을 돈 끼호테는 과감하게 그동안 머리에 있는 간수가 마를 정도로 머리에 불이 붙을 정도로 공부한 결과로 그 사실을 얻었고 그 것이 '기사도'라는 형식으로 표출이 되었다.
이러바 돈 끼호테는 스스로 현실속에서 가상현실을 만들어 그 현상으로 우리를 투시하여 현상을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돈 끼호테나 니체의 삶의 해석에 대해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그것은 저도 생각중입니다.
다음 이기간에는 니체의 삶의 해석에 대해 좀더 논하기로 하면서 그 답을 찾아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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