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사람들 ★★★★

그리스 사람들(브라보시리즈 4)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베르나르도 로고라 (사계절,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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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사진이나 우리가 알만한 문헌이 나와있지 않고 내용도 얇은 편이지만 구성상 그리스의 전반적인 역사나 문화를 간략하게 잘 설명하였다.

깊지 않기에 오히려 내용이 더 좋았다고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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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 시작이다.

비행기가 비상할때 걸리는 시간은 단 3분이다. 그러나 이 때 소모되는 에너지는 전체 에너지의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극복하며 순식간에 날아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한 비행기가 고도를 유지하며 비행할 때는 기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그다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
 
p121
고도원 지음, 에듀팅 그림 '어린이를 위한 꿈 너머 꿈 - 아침편지 고도원 선생님이 들려주는' 중에서 (나무생각)
시작인 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계획의 중요성을 말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저는 계획보다는 실천하는 순간이 그 시작의 반이라고 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주저함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일에는 주저합니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금전적인 것은? , 남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다시 이일로 주저 앉는다면 못 일어날수도 있을텐데....
 
방금전에 하수정님의 앤의 이야기에서 모퉁이 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앤은 친 핏줄은 아니지만 고아인 앤을 길러주신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위해 눈에 보이는 쉬운 길을 포기하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모퉁이를 돌아야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해피엔딩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어떨지 모릅니다.
넓은 광장이나 넓은 눈에 띄는 길이 나올거라고 기대하고 돌았지만, 막상 돌고 보니 끝도 알수가 없고 중간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미로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느겼을때,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갈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올때..
이러한 알수 없는 미래가 결심을, 실천을 주저하게 합니다.
 
그러나 저번에 영화 번개를 하실때 김주영님께서 성공하는 사람의 일에는 자신이 하는 직업의 종류와 시대적인것 보다는 결국은 실천을 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때 반성했습니다.
제가 너무 생각만 앞서고 생각만으로 일을 세우고 무너뜨리지 않았는지.
미래를 두려워 주저하지 않았는지.
 
비행기가 뜨기 위해서는 자기 연료의 반을 쏟아 붓듯이
실천에 모든 것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이 유지되도록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또한 잊지 마세요.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시작을 잘하였으나 과정을 망쳤더라도
마운드에 선 야구선수의 마음으로 일에 임해야 합니다.
첫공이 스크라이크가 되었더라도 이제 꽉차서 이 공마저 놓친다면 아웃이 되어 팀이 지더라도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순간, 이 공 하나만을 기억하세요.
앞에 놓쳐 공을 생각하시지 마시고,
앞에 잘못쳐 파울이 된 공도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이 공을 못 친다면 우리팀이 진다고도 생각하지 마세요.
단지 이 순간 이 공만 생각하시고
어떻게든 나는 살아나간다고만, 그것만 생각하세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흘러간 과거도, 불안한 미래도 아닌,
당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공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최선에 다한 스윙에 전부를 거세요.
그리고 결과에 순종하세요.
 
올해도 한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작년 12월에 2009년의 반성도 하셨을테고
2010년의 계획도 세우셨을겁니다.
이제 2010년의 새해가 밝은 이날 이제 우리는 실천에 힘을 세워야 합니다.
 
비행기가 구름 넘어에 있는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 하늘에 떠 있어야 하듯이
우리는 꿈넘어의 꿈을 향해
오리는 오늘도 실천하는 하루를 보내야 합니다.
 
이글 보시는 모두들 올해도 실천에 성공하는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실천에 성공하는 한해가 되겠습니다.
성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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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전기는 왜 그렇게 비쌀까? ★★★★★

p109
네팔에 살았을 때, 물가가 대부분 일본보다 낮은데 유달리 전기세만은 매우 비싼 것에 놀랐다.
...
네팔의 발전소 대부분이 원조라는 이름으로 선진공업국의 융자를 받아 건설되어서 그 빚을 갚는데 전기 요금을 쓰기 때문이다.
 
p110
쿨레카니 발전소는 1993년에 집중호우로 무너져 겨우 이틀만에 댐의 80%가 흙더미에 묻히고 말았다. 이 발전소는 당초 계획을 휠씬 밑도는 이익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네팔은 계속해서 일본에 거액의 빚을 갚아 나지 않으면 안된다.
 
p111
네팔의 작은 하천에는 '가타'라고 불리는 수차가 설치되어 쌀을 찧거나 밀가루를 만들거나 겨자기름을 짜는데 쓰이고 있다. ...
...
이에 나카르미는 낮에는 쌀을 찧거나 밀가루를 만들고 밤에는 전기를 만드는 다목적 수차를 개발했다.
 
p112
 
일본의 원조는 이런 기술의 존재를 무시하고 일본 기업의 이익을 위해 대규모 발전소를 세운다
 
다나카 유.가시다 히데키.마에키타미야코 지음, 이상술 옮김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 중에서 (알마)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 상세보기


선진국들이 그 많은 원조를 함에도 왜 그나라는 빈국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새마을 운동으로 성공을 했던것이 그 나라는 왜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왜 국제사업에는 현지화가 있으면서 원조에는 현지화가 없을까요?
 
다름을 무시하는 원조는 실패할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까요?
 
우리의 이익을 위해 언제까지 다른나라의 환경을 파괴하고 문화를 망치며 그들의 생활터전을 없애면서까지 효율이라는 이익을 취하여 할까요?
 
여기서는 팜유, 복사지, 무차별적인 고리사채같은 경제원조, 쓰레기 같은 구호품, 지역경제를 파탄시키는 도움등, 우리가 알아야 할 실제현상을 말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그들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게끔 할까요?
 
여기서는 다른책과 달리 간략하나마 3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번째가 그들의 나라에 식량을 자급자족하도록 도와주는 것
2번째가 전세계의 다국적 기업에 사회적인 책임을 묻기
3번째가 이들 다국적 기업에게 국제 과세를 물어 빈국에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
 
이 것으로도 부족할수도 있지만 그들이 최소한 자립하는데는 도움을 주며 인간으로써 존엄성을 가지는데는 부족함이 없을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리 우리가 실천적으로 할수 있고 아주 구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어 다른 책의 텍스트북으로도 무난할것 같습니다.
 
이 책은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꼭 읽어 보세요.
그리고 한번 우리의 이웃들인 그들에게 도움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하시는 시간을 갖고 기회를 가지시는 것도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일임에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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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편견,빈곤


p75
빈곤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당연시한다.
이러한 설명은 산업사회에서 규정된 빈곤의 개념을 전 세계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킨다.
...
빈곤은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화에 대한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개발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먼저 어떤 특정 방식으로 가난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p84
'발전'과 '세계화'는 식민주의가 완전히 억압하지 못한 예전 식민지들의 자립적인 삶을 계속해서 억압하고 있다. 만일 지금 서구에서 판에 박힌 수법으로 지속 가능성을 조장한다면 이는 토착민들의 자립적인 삶을 더 효과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p88
이렇게 세계시장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벌을 내리는 것은 횡포이다. 하지만 전 세계가 자신들의 규칙을 따라 살도록 결정해 버린 권력자들은 이것을 자유라 부르고 있다.
 
p91
이러한 현상들은 사람들이 탐욕스럽거나 이기적으로 변해서가 아니라 검소와 절제를 무시하는 체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양식은 지속적인 성장과 팽창을 제도화하고 있으며, 무제한적인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경제성장에 이용되고 있다.
 
 
제레미 시브룩 지음, 황성원 옮김 '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 - 세계의 빈곤 World Poverty' 중에서 (이후)
이 책을 읽으면서 빈곤의 개념을 재정립을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배워온 빈곤의 개념을 결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다른것을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우리의 하루 생활은 모든 것들이 내가 직접 생산한 것은 10%도 안되며 실제로 없을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에서 나의 생활에 돈은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므로 하루에 100달러도 적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산으로 가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나는 직접 쌀도 작농할수도 있고 아니면 산에서 나물이나 약초를 캐서 쌀과 교환을 해서 생활을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부산물로 돈이 생긴다면 나는 저축을 해서 나중에 아플때 약을 구하거나 옷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매일 발생하지 않으므로 난 하루에 1달러로 살아간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자! 과연 1달러로 살아가는 산에서 무기농으로 산과 자연을 벗삼아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난하다고 하여 무시할수가 있을까요?
100달러를 쓰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도시인을 잘 산다고 할수가 있을까요?
 
부의 기준과 빈곤의 기준을 단지 돈으로만 계산하여 살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너무 생활의 기준을 획인화하여 생각하여 내 자신을 구속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으신가요?
 
우리는 한해가 저물거나 어느 특정한 일이 있을때 가장 행복한 나라와 가장 불행하다는 나라의 순위를 나타내는 나라들을 봤을때 빈국에 속하는 나라가 오히려 가장 행복하다는 나라에 속하고 선진복지국가라고 하는 덴마크나 스웨덴이 오히려 30위에 속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신가요?
그리고 느껴셨다면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개발을 하면 모두가 잘살아야 하는데 용산 사태처럼 저렇게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사람이 생길까요?
 
경제의 기본 원칙은 모두가 서로에게 이익을 되는 행동에서 발생한다는 것인데, 왜 누구는 세상의 부를 모두 짊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를 생활하는 것 조차 목숨을 걸어야 할까요?
 
저는 이 것을 보면서 우리의 경제 교육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즉, 어느 물품이나 재화의 다름은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봄니다. 미술품을 예로 들어서 램브란트가 그린 초기의 습작같은 그림은 누가 봐도 어설프더라도 그 작품 같지도 않은 그림은 몇억씩 합니다. 단지 램브란트가 그렸다는 이유 만으로 그 그림은 작품이 아니더라도 옳다는 전제가 깔립니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영감을 불러 일으키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무명화가의 그림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몇백만원을 받기도 힘듭니다.   사람의 감정도 돈의 검증을 받아야만 한가요?  무엇이 문제 일까요?
 
개발이라는 것을 발전을 시키기 위한 시작단계라고 봅니다. 그러면 발전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내용들을 본다면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일정한 방향이란 어떤 것일까요?
과연 일정한 방향이라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요?
사회적합의라는 일정한 방향에는 다름이 없는 것인가요?
 
우리는 여기에 문제점을 봐야 합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일정한 방향으로 가야 하기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사회발전이란 명분에 다르게 가는 것을 다르다고 하지 않고 틀리다고 하며 그 다름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법으로 강제적으로 쫒아 내거나 보상이라는 명분으로 강제적으로 내 규칙에 들어오게 하는 것!
그 사람이나 그 가족, 아니면 더 크게 후진국이라고 불리우는 그 독특한 문화공동체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빌딩숲으로 쌓여 있는 사회를 선진화된 도시라고 불리우며, 그러한 시스템이 없는 곳을 미개로 부르는 그 선진문명이라고 불리우는 오만한 사회가 과연 부의 진정한 기준이며 인간의 행복의 기준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이러한 저의 정의를 나눔에도 저만의 오만이 생겨 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들만의 정의를 과연 남에게 권하고 이러한 경제영역에 포함하지 않으려는 나라들을 정치나 쿠테타나 테러로 길들여 소기의 목적을 채우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긴 원죄를 두려워해 자기 나라에 입국하는 모든 사람들을 감시할려는 요즘의 보안시스템의 강화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두려워하게 된것이 과연 무엇 때문에 생긴것인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 것인지, 그 근본적인 것을 알면서도 범지구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자초하면서도 그렇게 자기만의 부를 축적하고 싶은지 묻고 싶습니다.
 
또한 해마다 가장 부유하다는 나라와 인간발전지수가 높은 나라들과 행복한 나라의 순위를 비교할때 과연 우리는 행복하는 기준을 인간적인 기준이 아닌 지식과 교양과 돈으로만 판단하는 정형화된 기준을 언제까지 유지 할것인지도 묻고 싶습니다.  이러한 정형화된 기준이 높다는 나라에서 왜 갈수록 우울증과 자살이 증가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부유함과 빈곤함은 명확히 부자들만 이롭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조이라고 하는데, 왜 대다수는 이러한 불리한 이데올로기에 편협하도 동조를 하는지, 그 희생양에 자신이 포함되고 있는데 왜 자신은 그 범위에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어제 차에서 부산으로 내려 갈때 DMB로 친환경농법으로 사과를 생산하고 오이와 채소를 기르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아오모리현의 어떤 농부가 사과농사를 짓는데 자신의 아내되는 분이 농약 알레르기가 있어 친환경으로 사과를 지을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사과가 열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 열심히 친환경을 하고자 잡초도 제거하고 퇴비도 주고 여러가지를 시도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 그래서 포기를 하고 죽을려고 산에 올라갔다고 하죠. 그 때 그분은 발견을 한것입니다.  '그래 산에서처럼하자, 자연 그대로 그렇게 작업을 하자' 그렇게 결심하고 내려와 과수원을 원시림의 산처럼 그냥 두었습니다.  퇴비도 안주었다고 하죠.
다시 그러기 몇년 드디어 그 사과나무는 꽃을 맺고 열매가 달렸는데 그 사과의 당도와 맛은 어느 것과 비교가 안되며 완전 천연 식품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자연적으로 자라다 보니 억지로 질소를 넣어 키운 사과보다 조직도가 더 좋아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섞지 않고 그대로 수분만 빠져 마르는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그 밖에 미국의 돼지와 소 닭의 자연상태의 사육을 보면서 ' 아! 우리는 농사짓는 방법마저 획인화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농부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오히려 하지 않은게 성공적이었다고..
저는 여기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다고..
자연의 농사법처럼 퇴비도 안주고 잡초도 제거 하지도 않아도 되는 일을, 우리는 너무 많이 알기에 일부러 힘들여서 하고 있다고,
여기에 더 나아가 우리가 부를 획득하는 것도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너무 많은 것을 비교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성공한 사람의 전기와 평전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성공해야지 하고 수십명이, 아니 수천명이 그렇게 따라하고 아웃라이어나 탤런트코드 처럼 성공하기 위해서는 저렇게 해야지 성공한다는 성공코드를 그렇게 따라하는 것조차 우리는 세계의 불평등과 빈곤을 부축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않았다는 불안감에 쌓이는 우리들,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단지 성공을 위한 패러다임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살기 위한 공존을, 사회주의와 같이 다 같이 잘 살겠다고 하면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 하여 오히려 실패를 자초한 것과 다른,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나의 넘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모자람에 신경을 쓰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언제끔 그러한 세상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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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굶주리게 하는가?

제네바의 은행가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 (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p163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중에서 (갈라파고스)
지금 세계에는 63억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을 100이 사는
마을로 축소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100명 중
52명은 여자이고
48명이 남자입니다.

30명은 아이들이고
70명이 어른들입니다
어른들 가운데 7명은 노인입니다

90명은 이성애자이고
10명이 동성애자입니다

70명은 유색인종이고
30명은 백인입니다.

61명은 아시아 사람이고
13명은 아프리카 사람
13명은 남북 아메리카 사람
12명은 유럽 사람
나머지 1명은 남태평양 지역 사람입니다.

33명이 기독교
19명이 이슬람교
13명이 힌두교
6명은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5명은 나무나 바위 같은 모든 자연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4명은 또 다른 종교들을 믿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17명은 중국어로 말하고
9명은 영어를  8명은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6명은 스페인어를, 6명은 러시아어를,
4명은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들을 모두 합해도 겨우 마을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반은 벵골어,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합니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일들을 안다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 죽기 직전이고
그러나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중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입니다.
74명이 39%를,
20명이 겨우 2%만 나눠가졌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은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았고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에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소유한자는
100명 중 7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마을사람들 중 1명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도 읽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괴롭힘이나 체포와 고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48명 보다 축복받았습니다.

당신이 만일
공습이나 폭격, 지뢰로 인해 다치거나 죽고
무장단체의 강간이나 납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지 않은 20명 보다 축복받았습니다.

1년 동안 마을에서는 1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2명의 아기가 새로이 태어나므로
마을 사람은 내년에 101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하세요
당신은 결코 상처받아 본적 없는 것처럼 사랑하세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춤을 추세요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노래하세요
땅 위의 천국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세요

먼저 당신이
사랑하세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당신과 다른 모든 이들을

이 편지를 읽는다면 그 순간
당신의 행복은 두 배 세 배로 커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당신을 생각해서
이 메일을 보내준 누군가가 있을 뿐 아니라
글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지금 당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돌고 도는 것은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다고

진정으로 나, 그리고 우리가
이 마을을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다면
정말로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갈라 놓는 비열한 힘으로부터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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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에 이 글을 보면서 저 마을의 상위 20%에 드는 저를 보면서 저는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사람들은 되살려 기억을 했지만 이내 그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이책을 보면서 다시금 나머지의 80%의 사람들은 다시금 기억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책은 저자의 감정적인 부분이 많아서 이 책 자체에서도 모순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책에서 우리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은 100명의 마을에서 나오는 80%의 가난한 사람보다는 더 힘든 가축보다 생존을 보장받기 힘든 20%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책에서도 빈곤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구조적인 기아에 대해서 논하고 있고 그 문제의 중심에는 다국적기업과 그 해당 국가의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주로 아프리카를 주로 다루고 있죠.
 
다른 이야기들은 이 얇은 책을 조금만 읽어보시면 알수 있으니 생략하고,
 
무엇이 이런 구조적인 기아에
수억명의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그 사람들을 도와줄 여력이 있는 우리가
굶주린 그들을 수수방관하면서, 그렇게 맥없이 그사람들이 죽는 현실을 외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우리가 살아가게끔 할수 있을까요?
 
 
그 것의 답은  이책의 후미에 나오는 부분으로 그 중심에는 사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승리자의 목소리라고 하는 신자유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들은 그 시장의 논리에서의 패배자이며 인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시장이라는 정글에서 아무리 먹고 먹히는 관계일지라고
배부른 사자는 다수의 영양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희생된 다른 영양들이 오히려 안심하고 살아갈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러한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 100명의 마을이라는 동네를 1명채 되지도 않는 반의 반에 또 다시 반에 그 반에 반의 사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탐욕의 끝은 어디까지인가요?
과연 저들의 재산의 수위가 어디까지 올라가는 것을 우리는 부러움의 대상으로만 인식을 해야 하는 걸까요?
 
효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일까요?
 
쓰나미로 질병에 고통받고 있는 아시아의 나라에 쓰레기 의약품을 내다버리듯 구호하는 일본과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
그들은 과연 선진국이라고 본받을만한 나라인가요?
그들은 무작정 여과없이 그대로 따라할 만한 나라인가요?
 
그들의 사상은 승리자의 사상입니다.
플라톤의 사상도 그렇고 다른 여타 서양 사상가들은 승리자의 사상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가 노동자의 사상인 사회주의가 나오면서 서양의 역사는 반성하게 됩니다.
 
서양의 민주주의의 모태라는 그리스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었던가요?
투표권자인 그리스 남성이 1명이라면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는 여자와 노예가 얼마나 있었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모르셨겠죠.
아테네의 그때 시민의 인구는 8만명선.
노예는 그 5배인 40만명정도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시민들은 생산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전쟁과 사상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부정했듯이
지금의 서방세계는 그러한 사상의 껍데기를 쓰면서 그 핵심은 부정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알기비아데스에서

소 : 그러면 도대체 사람은 무엇인가?

알 : 저로서는 답변을 못하겠는데요.

소 : 그래도 신체를 사용하는 쪽이라는 점만큼은 자네가 말할 수 있네.

알 : 예.

소 : 그러니까 말이야 혼 말고 다른 무엇이 그것을 사용하겠나?

알 : 다른 것이 아니라 혼이 사용하죠.

소 : 혼이 다스리면서겠지?

알 : 예.

 : p108 

 
라고 했지만 우리가 부러워하던 그 철학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철학이었으며 민주주의였을까요?
 
그들만의 리그인 민주주의를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그 대체성이 없는 반쪽짜리 사상만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할까요?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사상적으로 우월하고 많이 배우고 돈이 많더라도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아무리 배가 불러도 내 배를 채우기에만 급급하고 그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과연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가 말한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느 곳에 근거에 두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그 가난한사람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다음에 다른 책에서 설명하겠는데
그 책에서는 왜 '가난은 나라님도 못 도와준다' 라는 말이 생겼는지에 대한 시스템적인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이 책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겼습니다.
아무래도 학자이며서 실천가인 저자가 가지는 한계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같아 부담스러웠습니다.
사실상 우리 개개인이 직접적으로 할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할수 있는게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혜택이 그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봉지커피의 하나는 그들의 피땀으로 생산되어 우리가 부담없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말고 끊임없이 우리가 소비하는 그분들의 생산물을 기억하고 '공정무역상품' 같은 것들을 이용하면서 우리의 힘을 뭉쳐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에서 우리의 대부분은 승리자가 될수가 없습니다.
승리자는 오로지 상위 0.01%에게 돌아갈 뿐입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우리나라도 그러한 계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언제까지 우리는 경쟁이라는 바퀴를 우리들 스스로 돌리면서 그 바퀴에 벗어나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부르면서 힘들게 그 바퀴를 돌리고 있어야 하나요?
언젠가 낙오가 될지도 모르는 운명을 애써 외면한채..
 
저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체 의식이라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불편하다면 시장에서 지역사회를 위해 사주는 것.
대형마트보다는 알뜰하게 살수 있는 동네편의점에서 물건을 사주는 것.
그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작은 한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좀더 크게 근처 아시아나
더 멀게는 아프리카에도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 지구는 혼자 살기에는 넓지만 같이 살기에는 비좁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는 만약에 창조주가 있었다면 반드시 같이 화목하게 사시는 것을 원했을것이며
없더라도 우리는 같은 인간이라는 종족끼라도 어느 정도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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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상식의 괴리

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否認(부인)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다.
(요한볼프강 폰 괴테 - 독일의 철학자)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이며
내가 알고 있다는 것과 제대로 알아야 할 진실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겼습니다.
 
우리가 흔히 황희 정승하면 청백리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요?
 
아직도 동화책이나 교과서류에는 황희 하면 청백리로 가난하게 살고 공명정대했다고 했지만
그건 그 사람의 정치적인것일뿐 실 생활은 다르지만 우리는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황의는 청백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과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식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습니다.
 
세종 50권,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11월 24일(신유) 3번째기사
사헌부에서 황희의 파면 추방을 건의하니 관직을 파면하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부분의 주내용은 "그의 사위인 서달(徐達)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이수강(李守剛)과 곽규(郭珪) 등과 내통하여 죄 없는 사람에게 화를 끼칠 뻔했다가 일이 발각되매, 이수강과 곽규 등이 모두 그 잘못을 자백하였습니다" 하여 황희의 죄를 간하고 그의 관직을 파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종께서 그의 능력을 높이사 다시 등용을 하게 되죠..
 
세종 91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10월 12일(신사) 4번째기사
에는 자신의 서자인 황중생이 대궐에서 금장식을 훔치다가 발각이 되자  황희는 중생이 자기의 소생이 아니라 하여 아들로 삼지 아니하니, 중생이 드디어 성(姓)을 조(趙)라고 불렀다.
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평생을 동화책처럼 가난하게 사신분이 관헌의 여종을 첩으로 삼았다?
20평 아파트에 살면서 2집살이 할다면 믿을수 있겠습니까?
부정축재가 아니고서야...
 
세종 40권,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6월 25일(병오) 1번째기사
박포의 아내라는 사람이 황희의 집에서 몇년을 기거하면서 간통을 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황희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奴婢)를 물려 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刑獄)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 그가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의논하거나 혹은 고문(顧問)에 대답하는 등과 같을 때에는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의논하는 것이 다 사리에 맞아서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됨이 없으므로, 임금에게 무겁게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술(心術)은 바르지 아니하니, 혹시 자기에게 거스리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하였다. 박용의 아내가 말[馬]을 뇌물로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일은 본래 허언(虛言)이 아니다. 임금이 대신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의금부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추국한 것이고, 대원(臺員)들이 거짓 복죄(服罪)한 것이다. 임금이 옳고 그른 것을 밝게 알고 있었으므로 또한 대원들을 죄주지 않고, 혹은 좌천시키고 혹은 고쳐 임명하기도 하였다. 만약에 정말로 박천기(朴天己)가 공술하지도 아니한 말을 강제로 〈헌부에서〉 초사를 받았다면 대원의 죄가 이와 같은 것에만 그쳤을 뿐이겠는가.
"
부분이 나오죠...
이 밖에 황희의 잘못된 부분은 이보다 몇군데 더 나옵니다.
절대로 이 사실로 보면 황희는 청백리가 될수가 없습니다.
단지 세종시절에 정승으로 24년간 정승이 되었다는 사실이 진실일뿐...
 
우리가 알고 있던 황희가 그 황희가 맞을까요?
과연 황희의 전설은 과연 무엇때문에 만들어졌고
그것을 믿게끔 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x-file 처럼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쯤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부정할때가 된것입니다.
우리는 피상적인 상식에 기대어 저사람은 역사관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지마는
그 역사관의 진실이 무엇인지
실제적인 실물을 확인하는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다고 한지가 몇년이 흘렀습니다.
과연 이 정보의 바다가 얼마만큼의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을 해본적이 있습니까?
그 사실을 믿기 위해 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가서 실제로 그 사람에게, 아니면 그 현장에서 벌어지는 실제 사실에 대해 접해 본적이 있습니까?
 
황희라는 인물에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씌여져 있는 온라인 조선왕조실록에 조차 접근하여 사실유무조차 확인하여 보지 않는데 어떻게 밀리언셀러라는 책에 대해 단 하나의 의심없이 믿을수가 있을까요?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에는 4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되는 것만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지 말 것.
둘째, 검토할 문제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가장 단순한 대상에서 출발하여 가장 복잡한 대상의 인식으로 나아갈 것.
넷째,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
 
좀 혼란스럽겠지만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과연 이 현시대에서의 교과서나 동화책일까요? 조선왕조실록일까요?
가장 단순한 대상인 조선왕조실록에서 황희를 검색하여 분석하면 꽤 근접한 황희 정승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까요?
실록말고도 다른 고서를 찾아보면 더 정확하게 입체적으로 알수 있지 않을까요?
 
 
 -  역사란 언제나 패배자에게 등을 돌리고 승리자를 옳다고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
(S. 츠바이크 - 오스트리아 소설가:1881~1942)
 
역사의 잘못된 해석은 황희의 드라마틱한 동화책의 등장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들게 됩니다.
아무리 박사면 무엇하고 아무리 많이 안다고 무엇하겠습니까?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데...
 
소크라테스의 처(크산티페)가 악처로 유명한데 과연 그게 진실일까요?
플라톤이 지은 "파이돈"에 보면 두 부부는 서로 의가 가득한 사이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찾아보세요.
 
이거 점점 역사가 재미가 있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와 철학의 만남이라니....
 
믿는 자와 믿게 하는자, 그리고 삐딱하게 그것을 부정하는 진실을 찾아내는 자.
누가 이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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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반성하기

그냥 생각만 하는 것과 기록하는 것 큰 차이가 있다. 기록한다는 건 자기 이야기를 객관화하는 일이다. 쓰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차분히 정리해야 하므로 저절로 제3자의 시선이 되고, 쓰고 나서 읽어보면서 다시 한번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기 문제를 돌아볼 수 있다. 이는 과거를 돌아보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김영아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 - 김영아의 독서치유 에세이' 중에서 (삼인)
요즘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수 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가정이란 작은 존재도 한 사회의 일부분이니깐 내가 가족을 떠나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사회적인 일부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것에서 문제점이 출발하고 문제점이 해결된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여러가지의 상황과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많들어내는 복합적인 부딪침은 어떠한 교과서나 어떠한 치료자가 있더라도 자신이 변할려는 의지가 우선 있지 않으면 시도조차 힘들며 진척 또한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일기라든지 여러가지 형태로 자신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말로써 해결하는 것은 어쩌면 경솔한 행동으로 또 다른 오해를 낳을수도 있고 녹음하지 않는 이상 다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그렇게 말했는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이렇게 글쓰기에 집착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을 할때 실수할까봐 속으로 끙끙 앓기보다는 이렇게 독서를 하거나 다른 블로그에서 글을 적음으로 해서 내 생각을 표현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간접적이나마 말을 하고 이따금 지난 포스팅을 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생각을 하여 썼을까? 하며 그때 당시를 생각하며 다시금 나를 반성합니다.
 
이상하게 살아가면서 지식보다는 지혜를 갈구하지만 늘 지혜는 내 주위를 맴돌뿐 나에게 직접적으로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단지 이렇게 글로써 그 힌트를 줄 뿐입니다.
제일 좋은 치료제는 자신이 우선 나서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제가 그러한 오해에서 한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좀더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때문에 오해를 갈등으로 키웠지 않나 반성해봅니다.
아픈 영혼과 아픈 영혼이 서로의 아픔을 알지만 서로가 외면하여 생기는 갈등이 더 없었으면 생각해보며
이 책에서 많은 감정의 멍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 자신의 멍때문에 다른 사람의 멍을 지게 한것도 부끄럽게 느꼈습니다.
 
이제 좀더 늦지 않게 나의 잘못은 내가 인정을 하고
좀더 인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니면 좀더 가족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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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두개의 자아를 인정하라

상처 입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현실의 이성적 자아 저 안쪽에 '상처 입은 그 순간'의 옛 자아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옛 자아는 지금 나와는 별개의 인격체다. 이해하는 것 지금의 나일 뿐이다. 지금의 내가 자유로워지려면 옛 자아를 달래 주어야 한다.
지금 나는 옛 자아의 어머니인 것이다.
김영아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 - 김영아의 독서치유 에세이' 중에서 (삼인)
저 책의 주인공처럼 사실 저도 어릴적에 장사를 했던 집안이라 어릴때 기억으로 그렇게 유쾌하거나 따뜻한던 적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성격을 보더라도 그래도 어릴때 부모님과 더 같이 지냈던 동생은 성격이 온화하고 더 밝으니깐요...
 
삶은 자주 우리에게 많은 선택을 하게 합니다.
내가 성공하여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부모님과 대화를 자주하기보다는 좀더 성공하기 위해 뛰어다니거나 공부를 하죠
이건 나만을 위해 그런것이 아니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위의 주인공의 부모님도 그렇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린 주인공과 더 어린 동생을 집에 두고서 방문을 잠겨놓고 일을 나가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다 이게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그렇다는  당위성을 부여하셨겠죠...
 
이러한 주인공과 같이 피해의 당사자가 느끼는 마음에
 이해심과 섭섭한 마음이 항상 같이 공존하고 있지만
언제나 이 둘은 공존을 하면서도 친해질수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셋방 더부살이와 같이
화목하게 지내기 보다는 갈등을 유발하는 관계일수 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사람과의 관계가 더욱더 진척이 될수록
처음에 작아 무시해도 될것만같았던 이 작은 섭섭함의 자아는
수면아래에 있었던것뿐, 보이지 않았을뿐,
그 동안 점점 커져왔었고
그 것이 지금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이해심보다는
과거에서 쌓이고 쌓였던, 계속 보이지 않게 커져온 섭섭함이
은연중에 그 균형을 잃고 폭력이나 일탈과 같은 비도덕적이고
자기도 용납을 하지 못하는 비양심적인 행동을 유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지 그 당시에 그럴수 밖에는 없었지만
그때문에 상처받은거에 미안하다고.
그 당시에는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하고
매몰차게 그렇게 했지만 그땐 너무 미안했었다고
 
진심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인 대면하지 못하고 무심코 그냥 넘기는 그 것들이
나중에 갈등이 오해를 낳고 그것이 서로에게 원수같이 되는 것은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친한 사이들에게는  너무 어리석인 일인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너무 현실세계에는 쉽게, 그냥 아주 쉽게
당연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너무도 많아
서로간에 감정이 쌓였던것이 마침내 폭발하고 앙금으로 남아
서로가 대립하고 법정으로까지 가며
죄없는 제3자에게까지도 이유없는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심없는 진심어린 대화
그것이 가족이든 직원과 사장이든
이러한 믿음과 신뢰가 깃든 대화에서
가정의 화목과, 직장의 성공이 시작하는것 같아
이렇게 글을 한번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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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stage2 - Study/책대출 2009. 12. 10. 09:52
행복의 정복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버틀란트 러셀 (문예출판사, 2009년)
상세보기


p16
 
뭐야? 부자는 꼭 행복해야 한다고? 그러면 뭐야? 가난하고 불행한 나는? [2009-12-10 오전 6:04:20]  
 
p17
 
행복의 첫걸음은 내 자신의 찌꺼기 부터 버려야 한다는 말씀? [2009-12-10 오전 6:06:48]
 
p19
 
자신에게 몰입하는 사람 유형 세가지
죄인, 자아도취, 과대망상
그러면 난 과대망상? [2009-12-10 오전 6:09:16]
 
p20
사랑이 죄인? 이건 너무 비약이 심하잖아. 프로이드 닮으려고? [2009-12-10 오전 6:11:08]
 
 
p20
 
자아도취가 죄인의 반대 개념? 이건 아니짢아 한쪽으로 편중됐다는 것에는 같은거 같아
편집광처럼 종류가 다를뿐... [2009-12-10 오전 6:13:07]
 
 
p21
뭐여? 이건 너무 편파적인 생각이잖아....
이사람 남성 우월주의야? [2009-12-10 오전 6:29:57]
 
p23
그래.. 그 근본적인 만족감이 뭐지? [2009-12-10 오전 6:33:53]
 
p28
이 사람은 행복을 어떤 기준점이나 자신의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 같군. 뭐야 자기스스로 자아도취를 하든 망상을 하든 만족하면 그만이 아닌가? 왜 당신이 나의 행복을 통제할려고 하는 거여? [2009-12-10 오전 6:41:36
 
 
p31
이사람 기껏 마음에 드는 이야기 하다가 또 마음에 안드네...
왜 이렇게 삐뚤어진거니... [2009-12-10 오전 6:44:40
 
35
이부분은 마음에 드는 군.
"미래만 주시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결과에 따라 현재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위험하다. 각각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그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 크게 생각하보면 현재라는 의미도 미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인데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상식이거든.. 그럼 과거의 희생과 현재의 희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이냐.. 인데. 글세.... [2009-12-10 오전 6:56:22
 
36
맞아 만약에 죽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거지. 왜냐고? 결론에서 의미가 주어진다면 결론이 없는 그 사람은 어떠한 존재의 의미도 없으니깐... 그래서 뱀파이어가 부러우면서도 불쌍한건가? [2009-12-10 오전 6: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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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에서 건축을 배웠다. ★★★★


나는 문학에서 건축을 배웠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억중 (동녘,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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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이라는 기계가 있다.
그 기계의 특성이 시간을 뛰어 넘나들어 천년전의 과거나 천년 후의 미래도 갈수가 있다는 상상속의 기계.
그 기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내가 잘못했던 실수했던 그 옛날로 되돌아가서 다시 바로잡고 싶고
또 한 1주일만 앞으로 갔다가 로또번호 알아내서 다시 이 시간으로 돌아오고 싶기도 하다.
또한 내 평생의 배필자를 미래로 가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서 사람찾는 시간을 줄이고 싶기도 하다.
 
인간은 원래는 각자의 힘으로 살아왔다.
손수 씨를 뿌려 곡식을 걷어서 그것으로 자급자족하여 내 가족을 먹여 살려왔고
사냥도 직접하여 잡아먹고 살아왔다.
그러던것이 1만년의 시간속에서 분업의 형태로 살아왔지만 그래도 자기가 노력한 만큼만 먹고 살아왔다.
물론 소수의 권력층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러던 어느 순간 인간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보다 더 얻게 되었다.
금융이 생기고 부터이다.
그때 부터 인간은 시간의 뛰어 넘기시작했다.
공간은 그때부터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공간은 공간일뿐....
 
과거의 몇세대가 이루어야 할 부를 한순간에 축적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시간을 정복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 그러한 시도로 타임머신을 꿈꾸기 시작했고 만들기에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와중에 놓친게 있다.
시간의 정복에 너무 눈을 돌린 나머지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쳐 버렸다.
 
그것은 공간...
우리가 함께 누리고 살아가는 공간이다.
빛과 같이 흘러가는 유유한 흐름에 시선을 빼앗긴채
우리는 우리가족과 지내는 이 공간을
어릴적에 같이 지냈던 친구의 추억이 있는 공간을
내 사랑이 숨쉬었던 공간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공간은 그대로 있었지만 우리가 그들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공간은 단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공간은 시간은 내포하는 타임머신과 같은 존재이다.
과거의 추억을 기억하게 하며 현재에 내가 들어설수 있게끔하는 포용력을 가지며
미래에 그 공간을 기약하며 꾸미고 노력하게 할 공간은
그 모든 것을 내포하는 타임머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한 현실속에 존재하는 극히 현실적인 타임머신을 부정하고
우리는 상상의 타임머신에 눈을 빼앗겨 버렸다.
 
 
얼마간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방은 깊고 깊은 속내를 보여준다. 이승에서 저승까지. 삶과 죽음의 인연이 거듭되는 곳, 방은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추억의 사원이었음을....
 
..
우리는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공간을 잊어버렸다.
같이 공유하면서 공유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전의 삶의 탄생과 생활 그리고 죽음까지 공유가 되어 추억이 되고 희망이 되며 미래가 되었던
그 생활의 공간을 잊어버리고
단지 우리는 단지 비어만있는 허무함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밖에서는 새벽비가 내리고 있고
나는 작은 방에서 빗소리가 가득찬 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공간은 몇년전부터 이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단지 책을 채우기위한 방도 아니었고 공부만 하기 위한 방도 잠을 자기 위한 방도 아니었을련지도 모른다.
한 겨울의 새벽에 빗소리 가득차기를
내가 새벽에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이 글을 쓰기를 이 집이 지어지고 몇년동안
방이라는 공간이 생긴후부터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 나는 이러한 기다림을 외면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 순간에는 그 나름의 법칙으로 그 이끌림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작은 방에서
불편한 의자에 까치발을 하듯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공간은 시간뿐만아니라 소리와 냄새와 느낌과 추억이 같이 공존하고 있는
가능태의 공간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이 가능태의 공간을 무시한채 단지 그 일부분인 시간에만 눈을 빼앗긴채 우리는 너무 급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고 나부터 반성을 한다.
 
그리고 단지 눕고 일어나는 공간이 아닌 무언가 내 삶을 지탱하는 그곳이 되어 버린 내방에서 오늘도 이렇게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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